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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산책] 쾌미(快美)한 한강 본류의 시작 ‘미호(渼湖)’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지다

경기도 하남시와 남양주시 사이 한강변에 위치한 미음나루

고영화(高永和) | 기사입력 2021/07/19 [15:29]

[자동차 산책] 쾌미(快美)한 한강 본류의 시작 ‘미호(渼湖)’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지다

경기도 하남시와 남양주시 사이 한강변에 위치한 미음나루

고영화(高永和) | 입력 : 2021/07/19 [15:29]
고영화 페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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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하남시와 남양주시 사이 한강변에는 미음나루(渼陰津)와 석실서원(石室書院) 터, 그리고 삼패동 평구역(平丘驛)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곳 한강 일대를 ‘미호(渼湖)’라 부른다. 팔당댐 입구 예빈산과 검단산 사이의 두미협을 빠르게 빠져나오던 강물이 넓고 느린 흐름으로 바뀌다보니 넓은 모래섬(渼沙)을 만들었고, 그 다음으로 심하게 한번 꺾이는 지점에 이르면, 수면에 잔물결(渼)이 살랑거리는 호수(湖水)가 펼쳐지듯 하는데 여기가 미호(渼湖)이다. 미호의 북쪽은 미금(渼金)이고 남쪽은 미사리(渼沙里)다. 굳이 미호의 구역을 경계 짓자면 왕숙천에서 동쪽으로 덕소리 입구까지를 일컫는 한강구간이다.

한편 우리가 한강(漢江)을 떠올리자면, 먼저 수도 서울을 관통하고 이천만 인구의 젖줄인 동시에, 또한 600년 대한민국의 도읍지를 관통해 유유히 흘러가는 국민의 강(江)이라 생각한다. 게다가 강폭이나 강물의 유속, 그리고 강물의 웅장함에 강한 인상을 받는다. 이러한 한강의 본류 중에서 미호(渼湖)가 위치한 곳은, 넓은 범람원과 함께 일련의 하중도(河中島)가 발달되어 모래섬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미사리(渼沙里)를 품고 흐르다가, 서편으로 강물이 꺾이는 지점에서 마치 광활한 호수 같은 풍경이 처음으로 펼쳐지는 쾌미(快美 마음이 시원스럽고 아름다움)한 곳이다.

조선후기의 문신 홍인모(洪仁謨 1755~1812)는 여주 쪽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따라 내려오다가 두미협(斗尾峽) 골짜기를 지나, 곧이어 만경징파(萬頃澄波)의 미호(渼湖)에 이르렀다.(出峽到渼湖) 그리고 그는 미호의 절경에 감탄하곤 칠언절구 시(詩) 한 편을 읊조린다. 시의 구절(句節) 중에, “안개구름이 아득하고 마치 물의 마을(荊吳) 같은, 드넓은 수면에 맑은 물결치는 호수, 바로 이곳이 미호일세.(雲烟渺闊似荊吳 萬頃澄波是渼湖)”라 노래했다. 이 구절은 미호(渼湖)의 풍광과 아름다움을 표현한 가장 적절한 시구(詩句)로 평가된다.

○ 예전엔 한때 미호(渼湖)를 미수(渼水) 또는 미음(渼陰)이라고도 불렀다. 무엇보다 미호에는 잘 알려진 미음나루(渼陰津)와 그리고 서쪽 편에 왕숙천(王宿川)이 있고 미음나루 동쪽 편에는 조선말기 노론 교육과 안동 김씨 세도의 진원지가 되었던 석실서원(石室書院)의 터가 있다. 이 서원을 창건할 때 처음에는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 1561~1637)과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 형제의 위패를 봉안했다고 한다. 그리고 동쪽 편 삼패동에는 평구역(平丘驛)이 있는데 조선시대 경기도 양주목(楊州牧) 지역의 역원(驛院) 중에 하나였다.

○ 남양주시 수석동의 석실서원은 조선후기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의 정신적 근거지로, 특히 새로운 화풍이었던 진경산수(眞景山水)를 일으킨 겸재 정선을 비롯한 후기 실학파의 중추적인 인물을 배출한 서원이었다. 이에 우리나라 진경문화(眞景文化)의 산실이요, 꽃을 피운 유서 깊은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석실서원에는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이 있어 아름다운 우리 땅을 소재로 한 진경시문(眞景詩文)이 쏟아져 나왔고, 그의 제자였던 진경시(眞景詩)의 대가 사천(?川) 이병연(李秉淵 1671~1751)과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을 배출된 곳이기도 하다.

● 1747년(영조23) 정묘년 봄에, 김창집(金昌集 1648~1722)의 손자로, 당숙인 숭겸(崇謙)에게 입양되어 김창협(金昌協 1653~1722)의 손자가 된 김원행(金元行 1702~1772)은 미호(渼湖)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따라 여주까지 여행했는데, 당시 미호(渼湖) 주변의 경치를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1) 미호에서 배를 띄워 여주로 향하다.[自渼湖發船 向驪州] 정묘년(丁卯 1747) ‘紙’ 운(韻) /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 1702~1772)

朝發石室祠 아침에 일찍이 석실사당에서 출발하여

登舟自玆始 이제야 비로소 미호의 배 위에 오른다오.

江山旣淸曠 이곳 산수 본디 맑게 뚝 트였는데

雲日?晴美 게다가 구름 낀 날씨지만 맑고 아름답구려

桃花依絶岸 깎아지른 벼랑엔 복사꽃 흐드러지고

老屋多臨水 물가에는 허름한 집들이 옹기종기,

中流散雲帆 강 한복판 여기저기 구름돛배 떠다니고

風濤浩未已 물결은 풍랑에 끊임없이 출렁이네

三峰出天畔 하늘 끝자락 우뚝 솟은 삼봉이여

秀色每相値 매번 눈 닿는 곳마다 수려한 빛 자랑하네

持杯屢相屬 걸핏하면 술잔 들고 권하다 보니

歌詠亦互起 여기저기 번갈아 시가까지 읊조린다

樂哉滄洲趣 즐겁고 즐겁도다, 창주의 정취여~

吾道信在此 우리의 도(道)는 참으로 여기에 있다네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 1702~1772)은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고 여기 시골에 은거하며 성리학 연구와 후학 양성, 저술 활동에만 전념하였고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낸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호를 미호(渼湖)로 삼았을 정도로 이곳을 사랑했다. 그가 위 시(詩)에서 미호의 봄 풍경을 말하길, “깎아지른 벼랑엔 복사꽃 흐드러지고 물가에는 허름한 집들이 옹기종기, 강 한복판 여기저기 구름돛배 떠다니고 물결은 풍랑에 끊임없이 출렁이네.”라고 읊었다. 마치 겸재 정선의 ‘미호(渼湖) 산수화’를 보는듯하다. 그리고 마지막 구절에서 “즐겁고 즐겁도다, 창주의 정취여~ 우리의 도(道)는 참으로 여기에 있다네.”라고 했는데, 이는 ‘미호 물가에 위치한 은사(隱士)의 거처에서 살면서 느끼는 은사(隱士)의 정취(情趣)야말로, 우리가 추구하는 유교의 도(道)가 아니냐고 반문하고 있다.

●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은 명문가 집안 출신으로 김상헌의 증손이며, 김수항의 셋째 아들로 김창집과 김창협의 동생이기도 하다. 형 창협과 함께 성리학과 문장으로 널리 이름을 떨쳤으나 과거에는 관심이 없었다. 1689년 기사환국 때 아버지가 사약을 받고 죽자 은거했다. 1722년 신임사화로 외딴 섬에 유배된 형 창집이 사약을 받고 죽자, 그도 지병이 악화되어 죽었다. 그의 대표작 ‘낙치설’과 ‘갈역잡영‘은 고등국어 교과서에도 나오는 명작이다.

○ 다음 시편은 김창흡(金昌翕)이 미음나루에 배를 정박하고 난 후, 느끼는 대로 자신의 심정을 드러낸 칠언절구이다. 삼산각에서 신선처럼 살고 있는 우리 세 형제는 한양의 좋은 음악과 맛 나는 음식도 부럽지 않다며 미호의 강물을 술을 삼아 풍류를 즐기며 살겠다고 한다. 그는 세속적인 갈등으로부터 벗어나 신선과 같이 살거나 혹은 자연에 담긴 만물의 이치를 체득하고자 성리학 연구에 전념 했던 학자였다.

2) 미호에 배를 정박해 놓고[到泊渼湖] ‘灰’ 운(韻)/ 김창흡(金昌翕 1653~1722)

??將欲泊 배를 정박하고자 천천히 가다보니

渼湖烟渚  미호의 물굽이마다 안개 자욱하네.

三山獻西笑 세 산(3형제)은 서쪽 한양을 향해 웃음 지으며

緩酌水中盃 느긋이 물속에 잠긴 술잔에다 잔질하누나.

[주1] 삼산(三山) : 세 개의 산. 삼신산(三神山) 봉래 영주 방장. 이백(李白 701~762)의 등금릉봉황대시(登金陵鳳凰臺詩)에 “세 산은 푸른 하늘 밖으로 반은 떨어졌고, 두 갈래 물길은 백로주를 가운데로 갈랐네(三山半落靑天外 二水中分白鷺洲)”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여기서는 김창흡(金昌翕)을 포함한 세 형제를 일컫는다.

[주2] 서소(西笑) : 헛된 일을 즐기다. 원래는 중원(中原)의 사람이 서쪽의 장안(長安)을 향해 웃음 짓는다는 뜻이다. 후한(後漢)의 환담신론(桓譚新論) 거폐(?蔽)에 “사람들이 장안의 좋은 음악을 들으면 문을 나서면서 서쪽을 향해 웃음 짓고, 고기 맛이 좋은 것을 알면 푸줏간을 대하고서 입맛을 크게 다신다.〔人聞長安樂 則出門而西向笑 知肉味美 則對屠門而大嚼〕”라는 관동(關東)의 속담을 소개하는 말이 나온다.

● 석실서원(石室書院)은 당시 인조 때 척화파를 이끌었던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과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형제를 기리기 위하여 1656년(효종7)에 창건하였고, 1663년(현종4) 석실사(石室祠)이라는 편액을 하사받고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 1697년(숙종23) 김수항(金壽恒)ㆍ민정중(閔鼎重)ㆍ이단상(李端相)이 배향되었고, 그 후 김창집(金昌集)ㆍ김창협(金昌協)ㆍ김창흡(金昌翕) 3형제와 김원행(金元行)ㆍ김이안(金履安)ㆍ김조순(金祖淳) 등이 추가 배향되었다. 경기도 남양주 와부의 석실촌은 김상헌(金尙憲)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갔다 돌아온 후 기거하다 사망한 곳이다.

그리고 석실서원은 18세기 중후반 노론의 교육 거점이기도 했고, 또 석실(石室)은 경기도 양주(楊州) 수석동에 있었던 마을 이름으로,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또 다른 호이기도 하다.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도성이 청나라 군대에 함락 당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김상헌은 남한산성에서 항복에 반대해 결사항전을 주장하다 청나라에 끌려가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 당시 중국의 세력판도와 청나라의 대세를 읽지 못하고 명분에 얽매여 명나라를 숭배하고 청나라를 무시하여 결국 화를 부른 것은 결코 잘 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두 형제가 나름대로 나라를 위해 충성한 것만은 또한 사실이다. 더하여 19세기 초 순조 때 김창집의 4대손 김조순(金祖淳 1765~1832)이 안동김씨 60년 세도정치를 열었다. 그러나 안동김씨 정권동안 조선왕조는 사회혼란과 농민항쟁(민란)을 야기 시켜, 나라의 국운이 기우는 결과를 초래했던 부정적인 역사가 있었다.

○ 조선말기 주자학자이자, 대표적인 위정척사파(서양세력을 배척) 중에 한 분이었던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默 1819~1891)은 1882년 전후 어느 해, 양주(楊州)의 석실서원(石室書院)을 방문했다. 그는 이항로(李恒老 1792~1868)와 홍직필(洪直弼 1776~1852)의 문인으로, 위정척사(衛正斥邪)를 주장한 일로, 지도(智島)섬에 유배되기도 한 인물이다. 다음 시는 ‘侵’ 운(韻) 칠언절구이다.

3) 석실서원을 배알하고[謁石室書院] / 김평묵(金平默 1819~1891)

石室祠堂何處尋 석실 사당(石室祠堂)을 어디에서 찾을꼬.

舊居蕭灑渼江  쓸쓸한 옛 터는 미강(渼江) 기슭에 있어라.

如今無地麟經誦 이제는 《춘추》 외우는 소리 들을 데가 없으니

讀罷牲章淚滿襟 제문을 읽고 나니 눈물이 옷깃을 적시네.

김평묵(金平默)은 조선말기 대표적인 위정척사파 이항로·기정진·김평묵·최익현·유인석 등의 유학자들 중에 한 분이었다. 그가 방문한 1882년 즈음의 석실서원(石室書院)은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폐된 후 훼철되어 있었다. 김평묵은 유배지에서 돌아온 후, 쓸쓸한 옛 서원의 터를 방문하곤 간단한 제물을 차려놓고 향을 피우며 제문을 읽었다. 現서원의 처지와 더불어 기울어가는 조선과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니 절로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후 1900년 고종임금은 금곡의 양주 조씨 일가의 무덤에다 자기가 죽은 후 묻힐 곳으로 정하였는데 현재 고종과 명성황후가 묻혀있는 홍릉(洪陵)이다. 그리고 양주 조씨 일가의 무덤 이장 지역을 석실서원 자리로 내 주게 되니 석실서원은 그야말로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

●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1)의 증손이자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의 둘째 아들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1653~1708)은 그의 나이 44세 때인 1695년부터 한양의 북악산 인왕산 자락인 장동(壯洞)을 떠나 남양주 한강변 미호(渼湖)에 터를 잡았다. 미음나루 부근 마을 앞에는 3개의 넓은 모래톱이 있었는데 농암(農岩)이 삼주(三洲)라 명명하고 자신의 또 다른 호(號)로 삼았으며, 그 모래톱 위에 지은 작은 사랑채의 당호가 삼산각(三山閣)이었다. 사람들이 이를 합쳐 ‘삼주삼산각(三洲三山閣)’이라 호칭했다. 김창협은 당쟁의 회오리 속에 관직을 사양하고 이곳에 있는 석실서원에 머물렀다고 한다. 자신의 아버지가 기사환국 때 죽임을 당하고, 갑술환국으로 다시 명예회복이 되는 비극을 겪었기 때문이다. 겸재 정선은 미호 그림 2점에서 이곳을 따뜻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연두빛 산과 화사한 빛의 들과 마을이 정감 있게 보인다.

그리곤 한양에서 배를 타고 한강 물길을 거슬러 올라왔던 많은 제자들을 석실서원에서 길러냈으며 거기 이병연, 정선, 조영석도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김창협(金昌協 1653~1708), 김창흡(金昌翕 1653~1722) 대에 이르러 한양의 북악산 인왕산 자락에서 생활하던 추종 세력들이 본격적으로 석실서원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4) 미음마을의 김창협(金昌協)을 방문하다[渼陰訪三洲] / 임방(任  1640~1724)

爲訪三洲老 김창협(金昌協) 어른을 방문하기 위해

停橈石室村 석실 마을에 정박(停泊)했다.

沿涯扶竹杖 물가를 대지팡이를 짚고 가다보니

臨水有柴門 강물에 임한 곳에 사립문이 있다.

別久容雖換 이별한지 오래되어 얼굴이 많이 변하였고

居閒道益尊 한가한 거처인데도 도(道)는 더욱 높아졌네.

開襟到深夜 속마음을 털어놓다보니 깊은 밤이 되었는데

摠是古人言 이 모두가 옛사람의 말씀인 것을.

[주1] 삼주(三洲) : 김창협(金昌協)의 호(號)가 농암(農岩) 또는 삼주(三洲)다. 미음(渼陰)나루 부근 마을 앞에 3개의 넓은 모래톱(三洲)이 있었고 그 모래톱 위에 김창협(金昌協)이 작은 사랑채를 지은 집의 당호가 삼산각(三山閣)이다.

[주2] 개금(開襟) : 가슴속에 품은 생각을 털어놓음. 속마음을 털어놓음

○ 미음나루(渼陰津)는 경기도 남양주시 서남단의 수석동 외미음에 있는 나루터로, 남양주시와 하남시 미사리를 이어주던 한강 나루이다. 미호나루(渼湖津) 또는 둔지나루라고도 불렀던 미음나루는 한강의 동쪽 나루터 중에 광나루에 버금가는 교통의 요지였다. 또한 주위에는 김창협이 살았다는 삼주삼산각(三州 三山閣)과 석실서원(石室書院)이 있으니 한강을 따라 오던 배들이 미음나루에서 석실서원에 필요한 물품을 하역한 것으로 보인다. <동국여지승람>과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살펴보면 “미음나루는 양주 읍치 동쪽 70리에 있는데 광주로 통하는 나루다."고 나와 있다. 미음나루는 평구역(삼패동에 있었던 역참)에서 광주를 잇는 나루터의 하나로 남북 교통의 요지였다.

● 다음 소개하는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의 5언시 <미호(渼湖)에 잠시 배를 대고(渼湖少泊)>의 내용을 살펴보면, 미호(渼湖)나루에는 물가 모래톱이 제법 넓어 손님 맞기에 넉넉했다고 하며 나루터 물가는 뽕나무와 버들이 드리우고 강 빛도 노을빛에 엉겨 물든다고 적고 있다. 마을 사람들이 여기서 빨래도 하고 낚시도 했으며 거대하고 그윽한 결기각(結綺閣, 화려한 누각)이 있는데 풍성하고 아름답다고 표현했다. 겸재 정선의 미호 ‘삼주삼산각’에서 정중앙에 있는 기와집 3채는 중국 남조(南朝) 진후주(陳後主)가 임춘(臨春)·결기(結綺)·망선(望仙) 등 3개의 화려한 누각을 지었는데, 이를 연상케 하는 청음 가문의 별서(別墅)로 여겨진다.

5) 미호(渼湖)에 잠시 배를 대고[渼湖少泊] ‘霽’ 운(韻) / 김창흡(金昌翕)

?棹渼湖間 미호(渼湖)에 잠시 배를 멈췄는데

優游亦是戾 한가하게 노는 것 또한 어그러지네.

洲渚饒應接 물가 모래톱은 손님을 맞기에 넉넉했고

晞目?淸霽 햇빛이 드러나며 맑게 개이어 눈이 밝아졌다.

朱霞漲桑柳 붉은 노을이 뽕나무와 버들에 드리우고

江色少凝滯 강 빛도 노을빛에 다소 엉겨 물들었네.

??水蟲  침착(??) 소리가 물벌레 소리로 오인했는데

蔽?林?  무성한 숲에는 매미소리가 요란하다.

漂女履一石 돌을 밟고 앉은 여인이 빨래를 하는데

釣兒竿何細 아이는 어찌하여 가는 낚싯대로 낚시를 하는고.

潭潭結綺閣 거대하고 그윽한 결기각(結綺閣)이 있는

臨水獨?麗 물가가 어찌나 풍성하고 아름다운지.

江湖豈不大 강호(江湖)가 어찌 크지 않다하리까.

物意紛涯際 사람에 따라 물가의 가장자리에 대해 분분하다.

扁舟可以下 조각배로도 충분히 건너 갈 수가 있으나

淺深吾何泥 내가 어찌 진흙탕이 깊은지 얕은지 알리오.

[주1] 침착(??) : 돌이 수면에서 들어났다가 숨었다가 할 때 일어나는 소리, 또는 그러한 모습

[주2] 결기각(結綺閣) : 금옥으로 장식된 화려한 누각 이름이다. 남조(南朝) 진후주(陳後主)가 임춘(臨春)·결기(結綺)·망선(望仙) 등 3개의 화려한 누각을 지었는데, 비단 술을 늘인 결기각에는 장 귀비(張貴妃)로 하여금 그곳에 기거케 하였다 한다.

6) 미음 도중에[渼陰道中] / 이하곤(李夏坤 1677~1724) 김창흡(金昌翕)의 문인

廣陵三月子?啼 춘삼월 광릉(양주시)에서 자규새가 울적에

兩岸桃花春欲迷 강 양쪽 언덕의 복사꽃이 봄을 미혹하누나.

風帆無數下江去 무수한 돛단배 강물 따라 지나가는데

目斷渼陰江水西 눈길이 미음의 강물 서쪽에서 끊어지누나.

● 평구역(平丘驛)은 조선시대 경기도 지역의 역도(驛道) 중 하나인 양주목(楊州牧) 평구도(平丘道)에 속한 역으로, 오늘날 경기도 남양주시 삼패동 평구 마을에 위치해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양주목 조에 따르면, 평구역은 양주목 동쪽 70리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평구역에는 역리(驛吏) 24명, 역노(驛奴) 44명, 역비(驛婢) 9명과 역마 9필이 배속되어 있었다. 평구역은 평구도의 본역(本驛)으로 찰방(察訪)이 주재(駐在)하였으며, 속역으로는 구곡역(仇谷驛)·쌍수역(雙樹驛)·봉안역(奉安驛)·오빈역(娛賓驛)·전곡역(田谷驛)·동백역(白冬驛)·감천역(甘泉驛)·연동역(連洞驛)·녹양역(綠楊驛)·안기역(安奇驛)·양문역(梁文驛) 등이 있었다.

7) 평구역에서 숙박하며[宿平邱驛] / 신좌모(申佐模 1799~1877)

日暮平邱驛 날 저문 평구역에서

懸燈宿水聲 등을 걸고 물소리 들으며 잠을 청하는데

煙嵐兩山霽 어스름 비안개가 양쪽 산에서 개이더니

星斗一江明 별들이 온 강물을 밝히네.

罪重恩還大 죄는 무거운데 비하여 은혜는 도리어 큰데도

身輕夢亦淸 몸은 가볍고 꿈 또한 맑구나.

耽行殊未已 즐거운 여행길이 도무지 끝날 줄 모르니

晨起問前程 새벽에 일어나 앞으로 가야할 길을 묻노라.

[주] 성두(星斗) : 북두와 남두, 성두는 별을 가리킨 것으로, 즉 뛰어난 재능을 지녔음을 뜻한다.

● 다음 한시 <평구역(平丘驛)>의 저자 원경하(元景夏 1698~1761)는 효종의 딸인 숙경공주의 손자이며, 경종·영조와는 진외가로 6촌 사이이다. 원경하는 부유한 가정에서 공주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났다. 당시 영조는 탕평책(蕩平策)을 내걸었다. 파당을 없애는 정책을 추진한 것이다. 이때 원경하는 영조의 신임을 받고 대탕평책을 선두에 서서 지휘하며 밀고 나갔다. 그는 노론 계열이면서도 노론의 일방적인 독주에 반대하고 공평한 인사정책을 주장했다. 또한 민중의 고통을 생각해서 조세를 감면하려고 노력했고, 권문세족만이 부정으로 과거에 합격하는 폐단을 바로잡으려고 심혈을 기울였으며, 그 누구보다 청렴하게 살았다. 게다가 그는 평생 타협과 균형을 위해 노력했지만 노론은 노론대로 자신들을 두둔해 주지 않는다고 비난했고, 남인은 다른 당파라고 업신여기고 냉대를 하니 정승 자리까지 오르지도 못하였고, 그에 대한 평가도 냉혹했다. 그러나 오늘날 그의 행적이 재평가를 받으면서 역사의 교훈으로 남는 인물로 인정받고 있다.

평구역[平丘驛] / 원경하(元景夏 1698~1761)

野店殘???鳴 시골 객주 집에서 닭 잡는 소리 ‘악악’ 울리더니

?燈?食曉煙生 등불 걸고 급히 아침을 먹고 보니 새벽안개가 피어나네.

馬嘶門外行人語 말울음 소리와 문 밖의 행인의 말소리가 들리고

三五明星樹?橫 보름날 밝은 샛별이 나뭇가지 끝을 가로지르네.

[주1] 구등(?燈) : 바람을 막기 위하여 불어리를 들씌운 등. 농(籠) 안에 넣은 등불

[주2] 욕식(?食) : 아침 일찍 떠나게 되어서 잠자리 속에서 급히 아침을 먹음.

[주3] 명성(明星) : 샛별, 새벽에 동쪽하늘에 밝게 보이는 금성. 밝은 별.

위 시 <평구역(平丘驛)>은 ‘庚’ 운(韻)의 칠언절구이다. 원경하(元景夏)는 어릴 때부터 검소한 생활을 몸에 익혔고 말을 타고 교외 나들이를 즐겨했다. 그는 옷과 신발도 늘 검소하게 차려입고 말안장에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아, 그가 부유한 집안의 자제인줄을 아무도 몰랐다고 한다. 시(詩) 내용에서 알 수 있듯, 어느 해 그는 양주 평거역까지 왔다가 객주에서 하룻밤을 청한 후에, 다음날 아침 일찍 출발하여 원주의 칠봉서원(七峰書院)으로 갈 예정이었다. 새벽녘 객주에서 닭 잡는 소리에 눈을 떠서 일어나 몸단장 하고 식사를 한 후에 문 밖을 나가보니 벌써 하인이 말을 준비하고 있고 전날 객주에서 함께 자고 일어난 손님들의 떠들썩한 소리로 요란하다. 문득 우러러본 하늘엔 새벽녘 샛별이 환하게 떠서 나뭇가지에 걸려있다.

고양화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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