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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확산과 함께 사라진 아르테미스 신전의 운명

이교도의 상징, 아르테미스 신전과 기독교의 대립
로마 제국의 정치적 변화와 신전 파괴의 배경
신전의 유산과 그 역사적 의미: 사라진 웅장함, 남은 흔적

전용현 기자 | 기사입력 2024/09/25 [07:57]

기독교 확산과 함께 사라진 아르테미스 신전의 운명

이교도의 상징, 아르테미스 신전과 기독교의 대립
로마 제국의 정치적 변화와 신전 파괴의 배경
신전의 유산과 그 역사적 의미: 사라진 웅장함, 남은 흔적

전용현 기자 | 입력 : 2024/09/25 [07:57]

[내외신문=전용현 기자]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손꼽히는 아르테미스 신전은 그 장엄함과 신성함으로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이들에게 경외심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이 신전은 결국 기독교의 확산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아르테미스 신전이 기독교와 함께 사라진 이유는 단순히 종교적 변화 때문만은 아니다. 이와 함께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변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신전은 점차 그 의미를 잃고 파괴의 길을 걷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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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테미스 신전(유투브 화면 캡쳐)아르테미스 신전의 파괴는 단순히 종교적 이유만이 아니라 정치적, 군사적 이유도 컸다. 서기 268년, 고토족의 침략으로 인해 신전은 큰 피해를 입었으며, 이후 재건되지 못했다. 고토족의 침략은 당시 로마 제국의 국경 지역을 불안정하게 만들었고, 이러한 침략으로 인해 로마 제국 내의 여러 도시들이 파괴되었다. 아르테미스 신전이 위치한 에페소스도 이로부터 자유롭지 않았고, 결국 신전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그리스 신화에서 달과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를 숭배하는 장소로, 에페소스의 중심이자 그리스 세계에서 중요한 종교적 중심지였다. 아르테미스는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여신으로,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존재였다. 신전은 기원전 550년경에 처음 세워졌고, 기원전 356년에는 화재로 인해 한 차례 파괴되었지만 이후 더욱 웅장하게 재건되었다. 그러나 서기 1세기경, 로마 제국 내에서 기독교가 확산되면서 이교도 신앙은 점차 설 자리를 잃기 시작했다.

 

기독교는 이교도의 신을 숭배하는 것을 우상 숭배로 간주하며 철저히 배격했다. 아르테미스 신전과 같은 장소는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더 이상 신성한 공간이 아닌, 이교도 종교의 상징적 건축물로 인식되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이교도의 신전과 우상을 파괴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러한 종교적 대립은 아르테미스 신전이 서기 268년 고토족의 침략으로 파괴되기까지, 그 신전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로마 제국 내 기독교의 부상과 변화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내적인 혼란과 불안정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점차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특히 서기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밀라노 칙령을 반포하여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면서 로마 제국 내에서 기독교는 강력한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이로 인해 기독교는 이교도를 배격하고, 자신들의 신앙 체계를 제국 전역으로 확산시키기 위한 활동을 더욱 적극적으로 벌이게 되었다.

 

아르테미스 신전이 위치한 에페소스는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경계에 위치한 중요한 도시로, 기독교의 전파가 빠르게 이루어진 곳 중 하나였다. 에페소스는 신약 성경에서도 중요한 도시로 등장하는데, 사도 바울이 기독교를 전파하며 이곳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울은 에페소스에서의 설교를 통해 많은 이교도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기독교로의 개종을 촉구했으며, 이는 아르테미스 신전과 같은 이교도 신앙을 믿던 사람들과의 충돌을 불러일으켰다.

 

아르테미스 신전 파괴와 정치적 배경

 

아르테미스 신전의 파괴는 단순히 종교적 이유만이 아니라 정치적, 군사적 이유도 컸다. 서기 268년, 고토족의 침략으로 인해 신전은 큰 피해를 입었으며, 이후 재건되지 못했다. 고토족의 침략은 당시 로마 제국의 국경 지역을 불안정하게 만들었고, 이러한 침략으로 인해 로마 제국 내의 여러 도시들이 파괴되었다. 아르테미스 신전이 위치한 에페소스도 이로부터 자유롭지 않았고, 결국 신전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 시기의 정치적 배경을 살펴보면, 로마 제국은 기독교의 확산과 함께 점차 이교도 신앙을 배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 테오도시우스 1세는 서기 380년,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선포하면서 이교도 신앙을 금지하는 법령을 발표했다. 이로 인해 아르테미스 신전과 같은 이교도 신전들은 더 이상 재건될 수 없었으며, 신전은 기독교인들의 공격을 받아 결국 폐허로 남게 되었다.

 

신전의 자취와 그 후의 역사

 

아르테미스 신전의 유적은 이후 다른 건축물의 자재로 재사용되었다. 특히 기독교인들은 신전의 대리석과 조각물들을 성당이나 교회 건축에 활용하며, 이교도의 흔적을 지우고 자신들의 신앙을 확립해 나갔다. 에페소스는 이후 기독교의 중요한 중심지로 자리 잡았으며, 아르테미스 신전의 흔적은 점차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19세기에 이르러 영국의 고고학자 존 터틀 우드가 에페소스에서 신전의 유적을 발굴하기 전까지, 아르테미스 신전은 그저 역사 속의 한 페이지로 남아 있었다. 우드의 발굴을 통해 신전의 기초와 일부 조각물들이 발견되었으며, 이를 통해 우리는 고대 세계의 웅장했던 신전의 모습을 부분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이 유적들은 그리스의 중요한 역사적 유산으로 남아 있으며, 그 일부는 런던의 대영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아르테미스 신전의 역사적 의미

 

아르테미스 신전은 그 자체로 고대 그리스의 종교적, 문화적 중심지였으며,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신성한 공간이었다. 신전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은 단순히 건축적 성취를 넘어, 당시 사람들의 신앙과 삶의 방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유적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의 확산과 함께 그 상징적 의미는 퇴색되었고, 신전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테미스 신전의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스 문화와 종교, 그리고 그들의 뛰어난 건축 기술을 상징하는 이 신전은 현대 고고학자들과 연구자들에게 중요한 연구 대상이며, 고대 그리스 문명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유적지로 평가받고 있다. 신전의 파괴와 함께 사라졌던 그 신성함과 위대함은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기독교와의 충돌 속에서 사라졌지만, 그 역사적 의미와 문화적 가치는 여전히 우리에게 큰 교훈을 남기고 있다. 이 신전은 고대 세계에서 인간이 이룩한 최고의 건축적 성취 중 하나였으며, 그 웅장한 모습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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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포털 지원센터 대표
내외신문 광주전남 본부장
월간 기후변화 기자
사단법인 환경과미래연구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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