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8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종합정책질의에서 더불어민주당 전혜숙 의원이 "우리 청년들이 '6시 34분, 국가는 없었다'며 정부의 책임을 묻기 시작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 한덕수 국무총리는 "현시점에서 보면 집회가 일어난 용산 쪽의 치안을 담당하는 분들이 제대로 못 했기 때문에, 국가는 분명히 없었던 것"이라고 답변했다.
‘국가는 없었다’는 발언은 일정 시간 동안 국가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못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국가의 기본적 책무는 어떤 상황에서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하는 것으로 단 한 순간의 공백도 허용될 수 없다.
불가항력적(不可抗力的)으로 발생하는 자연재해 등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국가의 예방통제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아 발생한 사고는 분명 사전에 막을 수 있었던 인재(人災)다.
그렇다면 국가의 예방적 통제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아 발생한 아깝게 희생된 생명과 재산적 손해에 대해 국가는 마땅히 책임을 부담해야 한다.
시스템은 자극을 받아야 반응을 하는 S-R(Stimulus-Response) 프로세스이기 때문에 자극이 없으면 정상적 작동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장관들이나 대통령실 참모들의 무딘 현실 인식 감각이 멀쩡한 국가 예방통제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렸다.
고위공직자들의 무딘 현실 감각 사례를 몇 가지 짚어보자.
경제부총리의 무딘 채권시장 감각 지난 9월 28일 김진태 지사는 강원도가 보증한 부채 2050억원을 갚지 않기 위해 ‘레고랜드 개발 주체인 강원중도개발을 회생신청하겠다’고 발표했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14일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레고랜드 사태 관련 질문에 대해, “강원도 문제는 강원도가 대응을 해야 하고, 아직 그 여파가 확산될 단계는 아닌 것 같지만 관심을 갖고 살펴보겠다”고 답변했다.
하지만, 금융시장은 추 부총리 발언과 달리 채권시장은 꽁꽁 얼어붙었다. 건설업계와 증권업계의 자금 사정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중소기업이나 소상공인의 과도한 추가 금리 부담은 말할 것도 없고, 멀쩡한 대기업까지 자금경색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부는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일요일인 지난달 23일에야 채권시장에 ‘50조원+알파’ 규모로 유동성을 공급하는 대책을 발표했다. 하지만, 채권시장의 혼돈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금융시장의 하루하루가 조마조마하다.
초기 대응을 제대로 해 예방통제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됐더라면 이런 금융시장의 혼란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대통령실 비서진, 금융위원회, 그리고, 행정안전부 등의 수수방관과 무대응은 더 큰 문제다. 행정부와의 적극적 소통 부실로 금융안정이 훼손된 결과에 대해 한국은행의 책임도 자유로울 수 없다. 금융권에 대한 공동검사권은 어디에 쓰려고 어렵사리 가져간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흥국생명 영구채 조기상환 콜옵션 행사 관련 금융당국의 무딘 감각 지난 1일 흥국생명은 5억달러 영구채의 콜옵션 행사를 취소했다. 영구채는 원금 상환 없이 이자만 영구히 지급하면 되지만, 5년 뒤 콜옵션 행사로 매입해 자금을 갚는 것이 일반적 관행이다. 흥국생명은 차환을 위해 새로운 영구채를 발행하려 했지만 10% 금리에도 투자자를 찾기 힘든 상황이 발생하자, 콜옵션을 행사하지 않고 6.7%로 높아진 금리를 부담할 판단을 했다.
이와 관련해 금융위원회는 지난 2일, “채권 발행 당시의 당사자 간 약정대로 금리 조건 등을 조정하는 게 합리적 선택이라고 판단했다. 채무불이행은 문제가 되지 않는 상황이다”라는 보도자료를 발표했다.
하지만, 흥국생명의 조치는 국제금융시장에 사실상 채무불이행으로 받아들여져, 시중은행의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이 급등했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등은 한국 금융사들의 자금조달 여건이 악화될 것으로 전망했다.
이후 외화채권 발행 시장이 급속하게 경색되는 등의 상황이 불어닥치자 금융당국은 황급히 보험업 감독규정의 아전인수격 유권해석으로 흥국생명이 콜옵션을 행사하도록 팔을 비틀었다. 태광산업 그룹 전체로 신용리스크 문제가 번지지 않을지 걱정이다.
외화채권 시장의 신용추락으로 국내 은행이나 공기업의 CDS 프레미엄이 오르고, 멀쩡한 기업이나 금융회사의 해외채권 발행이 사실상 불가능해진 것은 온전히 금융당국의 무딘 현실 감각 때문이다.
수출입은행이 마이너스 금리로 거액의 외화채권 발행에 성공했다는 뉴스를 접한 게 엊그제 같은데,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지 모를 일이다.
경제 및 금융 관련 행정부 수장들과 한국은행의 무딘 현실 감각에 한숨만 나올 뿐이다.
대통령실 경제수석의 NATO 정상회의 관련 엉뚱한 브리핑 최상목 경제수석은 지난 6월 28일 마드리드 프레스센터에서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정상회의 관련 브리핑 자리에서, "지난 20년 간 우리가 누려 왔던 중국을 통한 수출호황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고 말했고, "우리가 중국의 대안인 시장이 필요하고 다변화가 필요한 실정"이라고 주장했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지난 7월 26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우리나라 최대 수출시장인 중국에 대해 "무엇보다 중국 경제가 거의 '꼬라박는' 수준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대중국 수출 비중은 25.3%에 달해 미국과 EU 수출액 합계와 비슷한 수준이다. 홍콩 수출까지 감안하면 우리나라 전체 수출의 1/3에 해당한다.
대중 무역적자가 일시적이 아닌 구조적 현상으로 굳어진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한중 FTA와 중국의 기술 고도화로 중간재마저 우리가 수입해야만 할 형편이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적 '탈중국'은 중기적으로도 실현 불가능한 실정이다.
우리나라의 주요 수입품목은 거의 전부를 중국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최 수석의 발언은 상식 밖이다. 총리의 발언도 중국의 비위만 거스를 뿐 우리가 기대할 이익은 전혀 없다. 제2 또는 제3의 요소수 사태가 발생하지 않을지 걱정스럽다.
윤석열 정부의 한미일 국제 공조 분위기에 편승한 발언일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런 발언들은 무딘 현실 감각은 우리 경제를 ‘꼬라박는’ 수준으로 몰고 갈 뿐이다.
이태원 대형참사 관련 행정안전부 장관의 엉뚱한 초기 인식 이태원 핼러윈 참사가 발생한 다음 날인 지난달 30일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정부 첫 공식 브리핑에서, "특별히 우려할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모였던 것은 아니다" "경찰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라고 말했다. 국가나 경찰이 막을 수 없었던 천재지변으로 몰고 갈 의도로 보였다.
하지만, 주요 외신들은 하나같이 우리 정부의 부실한 사전 대응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이태원 참사와 관련해 ‘절대적으로 피할 수 있었던’(Absolutely avoidable)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하면서, 사전에 막을 수 있었던 인재(人災)임을 강조했다.
국내 언론도 가세해 정부의 부실한 사전 대응에 대해 비난이 거세자, 지난 1일 이상민 행안부 장관은, "유가족과 국민의 마음을 세심히 살피지 못했다"며 사과했다.
우리나라 경찰의 시위나 집회를 통제하는 예방통제 기능은 군사정권 시절부터 자타가 공인할 정도로 정교하다.
행안부 장관의 무딘 상황인식 능력이 국가의 예방통제 기능의 정상적 작동을 막은 것이다.
국가의 예방통제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려면 고위공직자들의 무딘 현실 감각은 하인리히 법칙(1:29:300)의 경고보다 더 많은 사건과 사고를 불러오게 될 것이다.
현실 감각은 일조일석(一朝一夕)에 갖춰지는 것이 아니다. 사전에 축적된 전문지식과 충분한 현장 경험이 있어야 한다.
고위공직자가 전문가로서 마땅히 기울여야 할 주의(Due Professional Care)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면 책임을 져야 한다.
전면적인 인적 쇄신이 필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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