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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巨濟島) 관문(關門), 사등면 ‘오양역(烏壤驛)’과 한시편

새로이 조성한 오양성에서 우연히 이루다[烏壤新造偶成] 7언율시(七言律詩) / 거제도 유배객 유헌(游軒) 정황(丁  1512~1560), 1558년 거제시 사등면 오양역에서. 고려말기 왜구의 잦은 침범으로 오양역을 폐지되었다가 두 차례의 대마도 정벌 후에 남해안 도서지방이 안정을 찾자 1425년(세종7년)에 다시 복구

고영화(高永和) | 기사입력 2021/07/09 [08:34]

거제도(巨濟島) 관문(關門), 사등면 ‘오양역(烏壤驛)’과 한시편

새로이 조성한 오양성에서 우연히 이루다[烏壤新造偶成] 7언율시(七言律詩) / 거제도 유배객 유헌(游軒) 정황(丁  1512~1560), 1558년 거제시 사등면 오양역에서. 고려말기 왜구의 잦은 침범으로 오양역을 폐지되었다가 두 차례의 대마도 정벌 후에 남해안 도서지방이 안정을 찾자 1425년(세종7년)에 다시 복구

고영화(高永和) | 입력 : 2021/07/09 [08:34]

<역(驛)>은 조선조에 공무를 띠고 여행하는 관리들에게 말과 숙식을 제공하는 장소였다. 또한 이외에 사신왕래에 따른 접대, 중앙과 지방 공문서의 전달, 진상물과 관급물자의 수송을 통해 중앙집권체제가 유지하는데 큰 기능을 담당하였다. 특히 변방의 군사상황을 알리는 파발제도를 역에서 주관하였기에 군사통신의 기능도 수행하였다.(역리는 기본적으로 세습제였다). 변방의 역원은 성곽을 구축해, 국가의 정보통신을 보호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조선시대 운송체계 관리> 역에서 하는 일은 교통, 운수 외에 죄인의 체포, 수감, 석방 등을 주관하였고 노비의 추쇄도 수행하였다. 역의 위치가 교통의 요지이므로 많은 사람이 왕래하였기 때문에 감찰의 기능을 부여하였다. 반면에 수시로 중앙의 관리와 공문서가 오갔으므로 한양과 다른 지역의 소식을 지역사회에 가장 먼저 전달하는 정보전달 매개체이기도 하였다. 역의 소용경비는 보름이나 월말에 정산하고 관장(官長)의 확인을 받았다. 역리는 한 달 혹은 일 년 정산서에 역에 사용한 모든 것, 예를 들어 식사에 소용된 쌀, 기름, 장, 소금 등을 물품별로 지출내역과 소용된 양을 날짜별로 상세히 기록하였다. 따라서 누가 언제 역을 이용하였으며 지출된 것은 무엇인가가 분명하였다.

1) 새로이 조성한 오양성에서 우연히 이루다[烏壤新造偶成] 7언율시(七言律詩) / 거제도 유배객 유헌(游軒) 정황(丁  1512~1560), 1558년 거제시 사등면 오양역에서.

百歲其生也有涯 백 살까지 이승에서 살 수나 있을까

如何一紀尙離家 오히려 집 떠난 지 12년이 지나 어찌하랴

累遷不是違埋  자주 옮겨 다니며 묽은 죽을 감추어도 없어지지 않고

新造元非祝哭歌 원래 새로이 만들어, 축하 자리에 우는 노래는 맞지 않다.

朝日東南心上受 동남쪽 아침 해는 마음속 깊이 응(應)하고

暮雲西北眼邊過 서북쪽 저물녘 구름은 눈가를 지난다.

秋風無限孤臣意 끝없는 가을바람 외로운 신하, 아~

見乃津頭費苦  견내량 나루에서 괴롭게 신음하네.

○ 고려시대 995년 성종 14년 중앙집권제와 지방통치제도가 확립되면서 전국을 연결하는 국도 22곳에는 곳곳에 역(驛)을 설치했다. 역은 모두 525곳으로, 각 주(州)에 속한 역로를 관리하도록 했는데, 중앙 개성으로부터 전국으로 뻗어나간 22개 역로 중에, 산남도(山南道)길 즉, 전북 전주에서 진안을 거쳐 경남의 거창∼합천∼진주(통영 거제)까지의 길로 28개의 역참 마지막 역이었다. 거제의 오양역(烏壤驛), 고성의 배둔역(背屯驛)과 함께 진주 평거역(平居驛)으로 연결되며 다시 여러 역로를 통해서 개경으로 연결된다.

고려시대 정과정(鄭瓜亭)을 지은 정서(鄭敍, 생존 연대 미상)이 역모로 1157년(의종11년)에 거제도로 귀양왔다. 거제현 오양역 인근에서 13년이라는 오랜 기간의 유배생활을 했으며, 고려 의종이 거제까지 유배를 온 결정적인 이유도 고려시대 역로 길 중, 당시 개성에서 가장 멀리 마지막에, 거제 오양역이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 이윽고 거제유배객 계회(정황丁  1512~1560)와 이별하려는데 계회(季晦)가 오양역관에서 배웅하는 나를 끌어당겨서 유숙했다.[旣別季晦 季晦追送于烏壤驛館 挽我留宿] 절구 하나를 써 주어, 다시 그 시에 차운한다(贈以一絶 仍次其韻) / 이정(李楨 1512-1571).

○ 구암(龜巖) 이정(李楨 1512-1571)은 1558년 두류산을 유람하다가, 귀양살이 하는 거제도 유헌(游軒) 정황(丁  1512~1560)을 만난 후, 다시 배를 타고 남해도 계응(季鷹) 김난상(金鸞祥 1507~1570)을 방문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당시 정황 선생이 거제시 사등면(견내량) 오양역관까지 이정 선생을 배웅하려고 나왔다가 헤어지기 싫어서 하룻밤을 더 보낸 후에 이 시를 남기고 아쉬운 마지막 이별을 하였다. 그리고 2년 후에 정황 선생은 배소 거제도에서 사망하였다.

四面雲天漠不開 사방의 하늘에 어두운 구름이 덮여 날이 개이지 않으니

此心終日?悠哉 이 마음은 하루 종일 근심스런 생각에 가이 없어라.

孤舟遠遠花田去 외딴 배는 저 멀리 화전(花田, 남해군)으로 가려는데

疋馬依依古縣回 필마가 헤어지기 아쉬워 고현(古縣, 거제읍치)으로 돌아가네

○ 덧붙여 차운하다(附元韻) 정계회(丁季晦). 정황(丁?)의 자(字).

임금을 향한 나(丁?)의 해바라기는 언제나 정겹게 피어있지만, 유배지에 덮인 어두운 구름과 장맛비처럼 나는 힘들고 외로운 귀양살이를 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도 해배 복권되길 학수고대하면서 쓸쓸히 잠 못 이루고 있다는 내용이다.

葵花雨裏盡情開 규화(葵花)는 빗속에서 정겨웁게 피워있고

上下雲煙孰見哉 아래위로 덮인 구름안개 어느 누가 보랴마는

已作淫霖思霽日 이미 시작된 장맛비에 개인 날이 생각나서

披?終夕獨遲回 밤새 도롱이 입고 홀로 배회하였어라.

[주] 규화(葵花) : 아욱과에 속한 여러해살이풀. 접시꽃, 해바라기 등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복구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거제현(巨濟縣)의 오양역(烏壤驛)을 복구(復舊)하였으니, 지현사(知縣事) 손이순(孫以恂)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당초에 고성(固城)의 송도역(松道驛)에서 거제현까지가 70리이고, 거기서 옥포(玉浦) 영등(永登) 각 포까지는 또 요원(遼遠)하므로, 송도역 말이 많이 시달려서 죽게 되는 까닭으로 이 역을 설치하게 된 것이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 세조 29권, 8년(1462 임오 ) 8월 5일 기사에는 "병조의 건의로 각도의 역·참을 파하고 역로를 정비하여 찰방과 역승을 두다" 오양역(말 5필에 역리 20명)을 포함한 16역은 소재도 역승(召材道驛丞)으로 일컫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1500년(연산6년) 오양에다 오양보(烏壤堡)와 역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오량성은 사등면 오양리 오량성(烏良城·도기념물 제109호) 1500년(연산군 6년)에 쌓은 성으로, 당시의 오양역(烏壤驛) 보루터다. 석축으로 된 이 성은 둘레가 1,172m, 높이 2.6m, 폭 5m이며, 성내는 마을이 대부분 들어섰으며, 성 밖은 논으로 사용되고 있다. 북쪽과 서쪽이 비교적 양호한 상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오양포(烏壤浦)를 말할 때 ‘오양역에 있다’는 한마디로 설명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진주 소촌역 문산찰방 관할로서의 역로의 끝에 위치한 종점 이었다.

3) 어자유(魚子游,어득강 1470~1550)와 헤어지고[別魚子游] / 홍언충(洪彦忠 1473~1508).

홍언충은 아버지 홍귀달(洪貴達 1438~1504)이 경원으로 유배될 적에 진보현(眞寶縣 청송군 진보)에서 다시 해도(海島) 거제도로 이배되었다. 이 글은 귀양살이하고 있는 홍언충에게 어득강(魚得江)이 찾아왔다가 다시 이별할 때, 아쉬움을 표현한 시(詩)이다.

烏壤驛中先報信 오양역에서 먼저 소식이 알려오더니

鷄籠山下卽相逢 계룡산 아래에서 곧 서로 만났다.

古憐萍水他鄕會 오랫동안 가엾게 떠돌아다니다가 타향에서 만났는데

今喜華夷一席同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이 한 자리에 함께 하니 더욱 기쁘구려.

數杯已醉吾衰矣 몇 잔의 술에 벌써 취하니 나는 이제 쇠로(衰老)하여

千語難窮子壯哉 천 마디 말도 헤아리기 어려운데 당신은 참으로 장하도다!

榮悴東西還異路 영고성쇠 동서고금에 따라 되레 길조차 달라지니

更將懷抱幾時開 앞으로 마음속에 품은 생각 언제 늘어놓으려나.

??未可留歸騎 총총(??)하여 돌아온 말을 머물게 할 수 없었고

兀兀頻傾醉後觴 올올(兀兀)하여 취한 후에도 자주 잔을 기울었다.

丹詔徵黃知有日 임금의 칙명으로 황패를 부르는 날이 있으리니

海邊須記白頭郞 바닷가 흰머리 사내를 꼭 기억해 주시길....

[주1] 오쇠의(吾衰矣) : 논어(論語) 술이(述而)에 “나는 이제 쇠로(衰老)하였다. 다시는 꿈속에서 주공(周公)을 뵐 수 없게 되었다.”라 하였다.

[주2] 총총(??) : 총총한 모양, 분주한 모양, 황급한 모양, 매우 바쁨

[주3] 올올(兀兀) : 마음을 한 곳에 쏟아 움직이지 않는 모양, 쉬지 않고 힘쓰는 모양, 흔들리어 위태로운 모양

[주4] 황패를 부르는 날(徵黃日) : 한(漢)나라 때 황패(黃?)가 영천태수(潁川太守)가 되어 큰 치적(治績)을 올리고 바로 경조윤(京兆尹)으로 징소(徵召)되었던 일을 가리킨다.

○ 거제도 지역 중에 ‘오양‘에다 역원을 둔 것은, 당시 고려시대에는 바다를 건너 최단거리인 이곳에서, 말이나 수레를 갈아타고 아주현 송변현 고현으로 가장 빠른 시간에 도착 할 수 있는 최단 거리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역의 재정을 꾸려나가기 위해 공해전이 필요 했는데 견내량에서 가장 가까운 근처에 하천과 들녘이 있는 지역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특히 거제도는 유배자가 많아 견내량을 진선(나룻배)를 타고 오양리까지 건너와서 배소지로 이동했다. 거제유배문학 중에 진선으로 건너는 그때 심정과 풍경을 읊은 시가 다수 전해지고 있다.

○ '오양'의 지명어원은 우리나라 고어 '오랑'=뱃대끈, 즉 안장이나 길마를 소나 말 위에 지울 적에 배에 조르는 줄을 말하는 뜻으로 역참의 제일 마지막 역인 오양역에서 역말을 교체하고 다시 안장과 길마를 장착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오랑'>'오양(烏壤) 한자어는 음을 빌려 차용한 것으로써 의미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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