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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아소탄광... 하루 17시간 '소처럼 일'

편집부 | 기사입력 2013/08/20 [16:27]

지옥의 아소탄광... 하루 17시간 '소처럼 일'

편집부 | 입력 : 2013/08/20 [16:27]


[내외신문=편집부]

케이블선 구타...상처에선 피고름냄새 진동
1만5천여명 강제노역... 죽으면 사고사 처리

아소부총리 증조부 운영 '아소탄광'수난사 출간


아소 다로(麻生太郞) 일본 부총리 겸 재무상의 증조부인 아소 다키치(麻生太吉)가 세운 아소 탄광 등 일본 내 탄광에서 일한 한인들의 수난사를 소개한 책이 나왔다. 지난 15일 출간된 일본인 현대사학자 다케우치 야스토(竹內康人·56)

씨의 '조사·조선인 강제노동 탄광편(사회평론사)'에는 일제 강점기 일본 내 조선인 광부들의 삶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돼지우리 같은 숙소에서 먹고 자며 하루 16∼17시간을 일하고 한 달에 받은 돈은 20엔이 채 안 됐다. 케이블선으로 얻어맞아 생긴 뱀 모양의 상처에서는 피고름 냄새가 진동했다.'

아소 다로(麻生太郞) 일본 부총리 겸 재무상의 증조부인 아소 다키치(麻生太吉)가 세운 아소 탄광 등 일본 내 탄광에서 일한 한인들의 수난사를 소개한 책이 나왔다.

지난 15일 출간된 일본인 현대사학자 다케우치 야스토(竹內康人·56)씨의 '조사·조선인 강제노동 탄광편(사회평론사)'에는 일제 강점기 일본 내 조선인 광부들의 삶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저자는 후생성 근로국의 '조선인 노무자에 관한 조사'와 후쿠오카현 지방 직업 소개사무소의 '조선인 노동상황' 등 정부 문서와 아소그룹의 사사(社史), 일본인 르포 작가 하야시(林) 에이다이씨의 기록 등을 토대로 책을 펴냈다.

 

◇할당량 채울 때까지 갱내= 아소그룹 계열 탄광에서 일한 조선인 노동자들의 환경은 '착취 지옥'으로 불렸다.

조선인 광부는 일이 많을 때는 하루 17시간 일했고, 한 달에 한번 꼴로 대량 생산 명령이 내려오면 할당량을 채울 때까지 갱내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그럼에도 1932년 아소 계열 탄광의 월 평균임금은 20엔이 채 안 됐다. 당시 미쓰비시(三菱) 제염의 평균 월급이 37.5엔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턱없이 낮은 수준이었다.

또 탄광 측은 수시로 폭력으로 노동을 강요했고, 부상자는 방치했다.

1932년 아소 계열 탄광에서 쟁의를 벌인 조선인들은 폭력과 학대 및 혹사 금지, 최저임금 보장, 상해·해고수당 지급, 근로조건 및 주거환경 개선, 강제 적립금 제도 폐지 등을 요구한 것으로 나타났다.

쟁의 참가자들이 만든 전단에는 '타도, 폭력 착취의 거수 아소 재벌', '민족 차별대우 절대 반대' 등 문구가 적혀 있었다.

아소그룹 자회사인 아소광업이 군수업체로 지정된 1944년에는 사내에 '가미카제(神風)' 생산특수대가 조직되면서 조선인 광부들에게 생사를 넘나드는 중노동이 가해졌다. 전쟁기간 아소 계열 탄광의 연간 생산량은 100만t이 넘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유골조차 귀향 못해= 아소그룹 계열의 아카사카(赤坂) 탄광에서 1928년부터 일한 황학성씨는 출입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기숙사 환경이 형무소보다 열악했다고 증언했다.

구타도 일상적이어서 케이블선으로 얻어맞은 조선인들의 목덜미에 남은 뱀 모양의 상처자국에서는 피고름이 나왔고, 그 때문에 악취가 진동했다고 황씨는 증언했다. 또 휴일에 조선인을 모아놓고 이유없이 때리는 노무관리자도 있었다.

1934년부터 같은 탄광에서 일한 장손명씨는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되자 증산 명령이 내려와서 처우가 악화했다"며 "휴일도 없이 소나 말처럼 일해야 했다"고 증언했다.

도주를 시도하거나 태업한 사람은 근무 교대 때 정좌한 상태에서 근로 감독자로부터 목도와 벨트 등으로 구타당했다. 조선인 광부는 린치를 당해 죽어도 채탄 중 사고사로 처리됐다고 장씨는 증언했다.

각종 사고사와 병사, 구타에 의한 사망 등으로 아소 계열의 탄광에서 숨진 조선인은 약 2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탄광 측은 처음에는 사망자 유골을 조선의 고향으로 보냈지만 전쟁에서 연합군에 밀리며 제해권을 빼앗기자 절에 유골을 맡겼다고 한다. 또 조의금과 보상금 지급마저 아까워 무연고자 묘지에 매장하는 경우도 많았다.

 

◇강제연행 조선인= 아소그룹은 1870년대 후쿠오카(福岡)현 치쿠호(築豊)에서 석탄 채굴을 시작해 러일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재벌로 성장했고 1910년대 후반부터 탄광에 조선인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30년대 들어 중국 푸순(撫順)탄광으로부터 석탄이 유입되면서 경영상 압박을 받자 1932년 임금을 낮추고 조선인을 대량 해고한 일도 있었다.

아소 계열 탄광에서 강제연행이 시작된 때는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9년인 것으로 후생성 기록에 나타나 있다. 그해 827명, 1940년 1천235명, 1941년 2천95명, 1942년에 2천126명, 1943년 1천864명, 1944년 1천804명, 1945년 672명 등 조선인 1만623명이 강제연행돼 아소그룹 소속 탄광에서 일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일본에서 정착해 살다가 '근로보국대' 등으로 강제동원된 조선인까지 포함하면 1만5천명을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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