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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최병화 대위 66년만에 국가유공자 인정

편집부 | 기사입력 2017/06/20 [19:51]

고 최병화 대위 66년만에 국가유공자 인정

편집부 | 입력 : 2017/06/20 [19:51]


나라사랑의 효를 실천한 인물로 역사에 남을 것

 

[내외신문=이형찬 기자] 6.25전쟁 당시 강원도 교암산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중동부 전선의 요충지를 통제해 아군의 전세를 주도하게 했던 고 최병화 대위(전사후 1계급 추서)가 66년만에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이와관련, 보훈의달을 맞이하여 6월19일 성산효대학원대학교 중강당에서 고 최병화 대위에 대한 국가유공자증서 전수식을 가졌다.

이날 전수식에서는 직계 가족이 없는 고 최병화 대위를 대신해 최성규 총장(국민대통합위원회 위원장)이 증서를 전달받았다.

고 최병화 대위는 나라사랑의 효(H.Y.O.) 등 하모니 7효의 정신을 실현하고 있는 성산효대학원대학교 최성규 총장의 삼촌이기도 하다.

전수식과 관련하여 최용호 교수의 사회로 개식 및 국민의례후 김시우 부총장이 고 최병화 대위에 대한 유공자 약력을 보고하고 최용석 교수가 최후결전 회고담을 낭독했으며 이광태 인천보훈지청장의 인사말, 최성규 총장의 유족 대표인사, 최병화 대위의 동생되는 최병일 목사의 축도 순으로 진행됐다.

 

유족 대표로 최성규 총장은 인사말을 통해 “먼저 이 뜻 깊은 자리를 있게 해 주신 이광태 인천보훈지청장님과 국가보훈 당국에 감사드린다”면서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께서 차관급인 국가보훈처를 장관급으로 격상시키고 보훈대상자들에게 각별한 관심과지원을 천명하신데 대하여 다행으로 생각하고 박수를 보낸다”고 말했다.

또?“전몰 유가족의 입장에서 감사하다는 생각 뿐이다”면서 “아시다시피 애국에는 희생과 봉사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하나 뿐인 목숨을 바치는 것 이상의 희생은 없다”고 전했다.

또한 “오늘의 우리들이 조국의 품안에서 행복을 추구하며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전몰용사들께서 목숨 바쳐 희생한 값진 결과다”면서 “현재 북한 실정을 보면 자유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신 이 분들의 희생이 얼마나 고귀하고 숭고한 것인지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된다. 감사해야 할 일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 성산 효 가족이 추진하고 있는 효를 통한 하모니사회 운동도 소외되거나 차별이 없는 『인류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구현하자는 운동이다”면서 “이제 세계가 부러워하는 새로운 국민정신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하모니 7효의 실현』은 우리 성산효대학원대학교의 존립 목적이자 사명이다. 그리고 우리가 효운동에 헌신하고 있는 목적이기도 하다”고 피력했다.

 

이와함께 “앞으로의 효 운동에 있어서도 효행실천운동과 함께, 소외되고 숨어 있는 효자와 애국자를 발굴하고 찾아서 현창하는 것도 중요하므로 이러한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고 덧붙였다.

김시우 교수는 약력보고를 통해 “故 최병화 대위는 스물다섯 젊디젊은 나이에, 아들 딸 하나 남기지 못하고, 절대 절명의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쳐서 나라 사랑의 효(HYO)를 실천한 애국의 귀감이요, 충의의 본보기로 고향의 전설이 되어 회자되고 있다”면서 “전사 당시에 금성지구 교암산전투를 승리로 이끈 공로를 인정받아 이미 미국정부로부터 은성무공훈장을 수여 받았지만, 정작 자신이 몸 바친 조국에서는 직계 가족이 없다는 이유로 아무런 표창도, 혜택도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국가에서는 유족이나 보살펴 줄 후손 하나 남기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유공자들에게 오히려 더 그 영령을 달래고 위무하는 배려가 필요하하다”면서 “그 공헌 또한 결코 적지 않으므로 물질이나 금전의 보상이 아니라, 이를 선양하고 현창하며 희생을 기리는데 보다 많은 관심이 있어야 도리에 맞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말했다.

 

한편 故 최병화 대위는 이제 국가유공자로 스물 다섯 나이에 웅대한 꿈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하나 뿐인 생명을 조국에 바쳐 장렬하게 산화했으며 67주년 6.25를 맞아 나라사랑에 대한 효를 실천한 인물로 대한민국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고 최병화 대위는]

故 최병화 대위는 일제 강점기인 1926년 1월 20일 당시 충남 연기군 전의면 고등리 283-1 번지에서 아버지 최영식, 어머니 임추경 여사를 부모님으로 4남 2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특히, 용모가 준수하여 장래의 촉망을 한 몸에 받은 가운데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동경 영화 학교 졸업 시기에 꿈에도 그리던 조국의 광복을 맞아 곧바로 귀국을 했다. 당시에 해방직후 혼란한 상황에서도 다시는 조국을 잃는 일만큼은 없어야 되겠다는 신념 아래, 자신의 역사적인 소명으로 국방의 일원이 되기로 결심하고 1948년 3월 1일 대한민국 창군요원으로 입대했다.

 

이어 훈련을 마치고 1950년 1월 10일부터 육군 제6사단 제2연대 작전주임 보좌관으로 근무하던 중 6.25가 발발하자, 헌신적이고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며 그 능력과 공로 그리고 장교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아 같은 해 10월 5일자로 국방의 간성인 육군 소위로 현지 임관했다.

 

1951년 3월 1일 중위로 진급, 동년 8월 2일 제2연대 제1대대 작전장교에 임명된 후 강원도 금화의 최전방에서 적진의 분쇄를 위해 작전기획과 전투수행에 있어서 헌신적인 노력을 다하여 전우들의 귀감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951년 10월 13일부터 21일까지 8일간 진행된 강원도 금화지구 교암산 전투에서 특공대를 주도하여 작전을 성공리에 수행함으로써 값진 승리를 조국에 선물하였지만, 전우들의 안타까운 절규를 뒤로 하면서 장렬한 최후를 맞았던 것이다.

 

금화지구 전투는 일진일퇴의 상황에서 피차 유리한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고지쟁탈 백병전으로 미군 제9군단과 중공군 제20병단 제67군이 맞서 싸운 6.25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의 하나로 6.25전사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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