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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박재연, ‘마음씨앗’은 이내 ‘싹’을 틔고, ‘有機的 덩어리’로 자란다

편집부 | 기사입력 2015/06/02 [10:36]

작가 박재연, ‘마음씨앗’은 이내 ‘싹’을 틔고, ‘有機的 덩어리’로 자란다

편집부 | 입력 : 2015/06/02 [10:36]


[내외신문=더피플] “작가 박재연의 작품들은 일견 삭막한 도회 이미지의 풍경조각처럼 보인다. 그것은 작가가 선택한 시멘트와 철이라는 건조한 재료들의 조합이나 조형상의 건축적 구조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그런데 위태해 보이는 불안한 구조와 그 표면의 결절들이 여실히 드러나 있는 개개의 작품들 앞에서 서성이던 우리들의 피폐하고 고단한 영혼이 생채기를 내며 무엇인가와 부단하게 투쟁해 온 작가 내면의 심리적 풍경과 이내 맞닥뜨리게 된다.

무엇과의 투쟁인가  불안한 실존의 무게, 그를 버거워하며 은거하던 자폐적인 공간으로부터 탈주하는 작가 스스로와의 투쟁이다. 작가는 애써 올린 시멘트의 표면을 긁어내거나 뚫어내고 그 위를 다시 채우는 식의 매체의 물리적 속성을 반복해서 탐구하면서 우리들 무의식 심연에 침잠한 불안 심리를 끌어내고 이와 적극적으로 대면한다.

그것이 특수성의 작가 자신의 내면으로 집중된다는 점에서, 박재연의 이번 전시는 불안한 실존의 무게를 되씹어 내면서 물질들을 상처내고 괴롭혀서 만들어낸 작가 내면의 처절한 독백이자 그것의 여정이 된다.” 2005년 5월 개인전 당시 김성호 미술평론가가 박재연 작가를 본 시선(視線)이다.

그리고 2013년 5월,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내 안에서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무엇인가를 바라본다. 무얼까. 그 감정의 출처가 궁금하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나 자신마저 낯선 덩어리들이 웅얼거리며 자신을 바라봐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 다른 구조를 가진 힘의 존재, 무의식중에 억압되어 의식되고 있지 않는 관념의 복합체, 그것은 어둠의 자화상인 콤플렉스(complex)이다.

의식과 상충되는 생각들이 미지의 구멍(hole)을 통과해 유기적(有機的)형태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 움직임을 그저 바라본다. 반복적이고 공통적인 언어들이 발견된다. hole과 선(線)은 응축된 에너지가 분출되는 통로이자 콤플렉스의 출처를 드러내는 장치이다.

작업은 이러한 안과 밖을 -드러나면서 감추어져 있는- 넘나드는 역동적인 움직임, 그 경계의 모호함이 주는 혼돈, 이러한 것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만지고, 이해하는 과정을 표현하고 있다.”

남의 눈에도, 자신의 생각으로도 작가 박재연의 작품은 대단히 ‘골치’ 아픈가 보다. 이것이 바로 소위 예술가의 숙명이란 것인가. 아니면 의무일까. 수많은 고뇌를 반복하고, 그 과정을 또 반복해야지만 비로소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다는 그 ‘무엇’인가.

그녀의 작업실에 들어서자 ‘아름다움’보다는 ‘투쟁적’인 느낌이 와 닿았다. 입구 외쪽에는 공장이나 건축현장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용접기계가 떡하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그 맞은편에는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시멘트 덩어리(?)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열대여섯 걸음을 더 옮겨 공장같은 작업실 맨 안쪽으로 가니 그곳에 ‘그것’이 있었다. “적당한 양의 흙을 한 줌 쥐고 양손으로 주무르고 비틀다가 어느 순간에 멈춘다. 이것은 내면에 갇힌 ‘웅얼거림’을 끌어내는 나만의 방식이다. 나는 이것을 움트는 ‘싹’에 비유한다.” 박재연 작가가 말한 ‘마음씨앗’ 모종밭이다.

이 씨앗이 싹을 틔고, 탈피(脫皮)도 하고 성질도 다듬어 ‘낯선 유기적 덩어리’로 성장한 것이다. 이는 여성이 아이를 잉태하고 조심조심하며 꼬박 열 달의 정성을 온전히 기울여야지만 탄생의 기쁨을 안을 수 있는 것과 그리 차이가 없어 보인다. 여러모로. 그래서인지 그들을 보는 박재연 작가의 ‘눈마음’은 애잔하기까지 하다.

그래도 그녀의 손은 따듯하다. 그리고 곱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온순하다. 구성요소는 시멘트와 철사지만 마주 보고 있으며 어느새 환담(歡談)을 나누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이내 ‘절친’이 된다. ‘씨앗’을 품고 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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