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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죽음’은 더 이상 있어선 안 된다. 발행인 나덕흥

편집부 | 기사입력 2015/04/30 [15:05]

‘이런 죽음’은 더 이상 있어선 안 된다. 발행인 나덕흥

편집부 | 입력 : 2015/04/30 [15:05]


[내외신문=더피플] 지난 달 21일 경남 진주에서 20대 남녀 4명이 승용차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차 안에는 연탄이 피어져 있었으며 ‘가족에 미안하다’고 적혀 있는 유서도 있었다.

이들은 사는 곳이 김해 수원 인천 밀양으로 다 다르고, 직업도 제 각각이다. 그런데 이들은 어떻게 알게 되고, 왜 이렇게 모여서 새파란 젊은 인생을 마감했을까.

짐작컨대 이들의 만남에는 SNS가 큰 몫을 했을 것이다. SNS를 탓할 수는 없다. 문제는 이들이 젊은 나이에 ‘자살’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모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죽음’이 있던 ‘그날’까지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많은 대화를 나눴을 것이다. 이제 막 세상살이를 하려는 ‘새싹’들이 죽음을 주제로 이야기를 해야 했던 심정은 어땠을까?

결국 이들은 ‘가족에 미안하다’며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가족엔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세상’엔 얼마나 큰 원망의 소리를 질러 댔을까. 얼마나 많이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자책(自責)하며 억울해 했을까.

‘이들의 죽음’의 1차적 책임은 분명 ‘이들’이 져야 한다. 그러나 세상은 이들에게 함부로 손가락질을 해서는 안 된다. 이들은 세상에서 내몰리고만 것이다. 이들에게 세상의 ‘따스한 손’은 없었다.

우리는 권력이든 금력(金力)이든 소위 ‘가진 자’에게만 모든 게 집중돼 있다. 그 ‘자리’에 있으며 자기만 누리려고 하고, 아니면 그 자리에 앉기 위해 잔인한 경기를 펼친다. 그리고 패배자는 버림받는다.

인간세상에서 ‘승부’는 당연히 있어야 한다. 그리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그러나 ‘경기’의 결과가 생사(生死)까지 정한다면 그 사회는 ‘죽은 사회’다.

현재 이 나라에서 자주 보이는 ‘이런 죽음’은 이 나라가 죽어가고 있다는 확증이다. 따뜻한 나눔과 배려가 필요한데, 그럴 기미(幾微)가 느껴지지 않는다. 결국 ‘가진 자’의 것을 빼어야만 한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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