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알에서 배꼽이 생기고 그 배꼽에서 새순이 돋아 나면…화가 김양희

편집부 | 기사입력 2015/04/29 [18:17]

알에서 배꼽이 생기고 그 배꼽에서 새순이 돋아 나면…화가 김양희

편집부 | 입력 : 2015/04/29 [18:17]


[내외신문=더피플] 화창한 봄날이었다. 김양희 화가를 만나러 가는 이른 오후, 경기도 광주 오포에 들어서자 색다른 그림들이다. 내 차에 동승한 ‘아가씨’의 목소리를 따라 도착한 그곳엔 콘크리트 벽돌로 형성된 적당한 규모의 건축물이 살고 있었다.

그 안은 황량하다는 기분이 몰려 왔다. 그녀를 마주 보기 전까지는. 그리고 그녀의 ‘분신’ 앞에 서자 따스함이 느껴졌다. 진짜 뜨끈한지는 잘 모른다. 정반대일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안겨왔다.

그녀는 큰 얼굴웃음으로 맞아 주었다. 매우 유쾌하다. 웃음소리도 상쾌하다. 옛날에도 그랬을까  아마 그랬으니까 지금 이렇겠지. 근데 그녀도 항상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삶을 고뇌하고, 작품에 괴로워했던 날이 한두개였을까. 그렇게 단련된 웃음을 그날 나에게 준 것이리라.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나와 그녀가 통할 수 있을까. 내가 대단히 바보같은 짓을 한 것이다. 그림 무식쟁이가 잘나가는 화가를 인터뷰하려 했다니. 뭔 대화를 할 수 있겠나. 그래서 난 듣기 시작했다. 나를 이해시키려 노력하는 것 같은데도, 사실 잘 모르겠더라. 그래도 고개는 끄덕거렸다. 일종의 예의 표시였다. 가끔 ‘횟소리’로 내가 살아 있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싶었다. 슬슬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마치 평소 먹지 않았던 이상한 음식이 내 몸에 들어 와 탈을 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거의 한 시간 정도는 참은 것 같다. 이 정도면 큰 실수는 하지 않은 것 아닌가.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카메라가 그리 나쁜 것은 아니라 사진이 잘 나올까를 걱정하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사진기 앞에 있는 그녀는 능동적으로 좋은 사진을 탄생시키려 노력하고 있었다. 아마 당연한 것이리라. 내 얼굴이 책에 나오는 것이 아니므로.

챙길 거 챙겨서 운전석에 앉았다. 그녀는 왔던 길의 반대쪽으로 가라고 말했다. 내 ‘아가씨’를 무시하는 것 같아 망설이고 있는 내게 엄중히 ‘강요’를 더 한다. 그 길은 꽃이 많았고, 나무가 초록이었다.

내 ‘자리’로 돌아 와 의자에 앉았다. 난감했다. 김양희 작가 인터뷰 기사를 어떻게 써야 할지 짙은 안개 속이었다. 그래도 한 ‘꼭지’는 만들어야 하니 이리저리 자료를 찾아 헤맸다. 하나 걸려들었다. 순간 내 마음이 평온해 졌다.

바로 그녀의 ‘작가노트’다. 감히(?) 내가 김양희 화가에 대해 뭘 어떻게 쓰겠는가. 지금부터 그녀가 이런 말을 한다.

※ 김양희 화가의 이야기

알(卵)에게 배꼽이 생긴다  우리가 학창시절에 배웠던 기본적인 생물학 지식에 의하면 동물의 탄생방식은 난생(卵生, oviparity)과 태생(胎生, viviparity)으로 구분되고 고등생명체의 탄생형태인 태생의 증표가 배꼽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알에게 배꼽이 생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이미 그 생명체의 속성이 변형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스로의 출생근원을 변경하면서까지 자기 실체를 부정하여야만 하는 이유가 궁금해진다.

변신은 비실재적이고 초월적인 현상이지만 인간이 의식적으로 절대자의 능력을 모방한 체험을 함으로써 절대자의 경지에 가까이 가고자 하는 인간 염원이 만들어낸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로마신화속의 올림포스 신들이 유희놀이의 수단으로 사용한 변신행위와 고대설화 속 도사들의 능수능란한 둔갑술(遁甲術)이 인간욕망이 만들어낸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피조물의 근본적인 한계를 극복하고자 꿈꾸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이 신화나 설화 속에서 ‘변신’이라는 형태로 표현된 것이다.

개별 피조물에게는 대자연의 절대적인 권위와 냉혹한 폭력은 오직 그에 대한 복종과 수용만이 개채의 생존을 보장한다는 섭리만을 강요하는 것일 뿐이다. 자연환경에 대한 적대적인 저항은 종(種)의 단절로 이어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대단한 권위와 폭력에 대한 피조물의 대응은 보다 기민(機敏)하다. 자연의 위압에 대한 순응적 태도의 결정체가 바로 변신이라 할 수 있다. 알에서 배꼽이 생기고 그 배꼽에서 새순이 돋아 식물이 생장한다는 것은 생존을 위한 생명체의 자발적인 변신과정 즉, 적극적 자연순응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고등생명체를 지향하는 알(卵)에게는 배꼽이 생겼고, 고착성(固着性)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초월하고자 하는 식물체는 궁극의 염원으로 탄생처가 고정된 대지가 아닌 대지로부터 자유로운 동물체로 변형하고자 하는 것이다.

절대자에 대한 적극적 순응과정이 변신이라면 소극적 순응수단으로는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소멸시키는 방법이 있다. 창조주가 부여한 피조물 고유의 물성을 변화시켜 스스로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는 것이다. 변신은 형태가 변화하지만 물성변이(物性變異)는 형태가 소멸되거나 새로 생성됨을 반복하면서 피조물 자체는 물론 피조물을 창조한 대자연도 그 존재와 실체를 분간하지 못하는 지경(地境)에 이르는 것이다.

다른 일면에서 보면 어쩌면 인간은 다른 세계를 꿈꾸느라 바로 여기가 그가 추구하는 다른 세계임을 자각하지 못하는 절대적 모순 속에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늘 몸부림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이기에, 스스로를 망각시키는 몽환(夢幻)속에 매몰되고자 하는 원초적 집착을 놓을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꽃이 비가 되기도 하고 안개가 되기도 하며 또 정원에 뿌려진 달빛들이 만발한 꽃들로 바뀌기도 하는 화려한 변신과 변이(變異)의 환상이 낯설지 않다. 대지가 곧 하늘이요 밤하늘이 곧 꽃밭이 되기도 하는 꿈과 같은 환영(幻影)이 어쩌면 나약한 피조물들에게는 편안한 안식처가 되기도 한다.

피조물에게 주어진 태생적 한계를 초월하여 더 진화한 형태로 나아가고자 하는 피조물의 생존본능을 표현하는데 이러한 ‘하이브리드(hybrid)적 생명현상’보다 더 적합한 것은 없을 듯싶다. 인간성 상실과 소외로 표현되는 현대사회의 가혹한 생존환경을 감안한다면 하이브리드는 더 이상 터부시 되는 이방인(異邦人)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의 현실을 개척해 나가는 진보정신의 표상(表象)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생명체라면 늘 자신의 고향을 그리워하듯 인간은 상실한 인간본성을 그리며 그곳으로 회귀하고자, 어느 날 문득 합리적 사고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 다시한번 경이로운 변신과 변이(變異)로의 일탈을 꿈꾸곤 한다.

태생적 한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이 자신의 삶을 향유하고자 하는 현대 인류들은 오늘도 부지불식간에 이미 변신과 변이를 시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번뇌를 넘고자 신(神)의 영역을 시샘하면서…. 피안(彼岸)은 현실과 별개의 존재가 아니란 것을 알면서도 그 무모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인간이 만물의 영장(靈長)이면서도 사고(思考)하는 절대적 모순체임이 분명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꽃들의 고향(故鄕), 달(月)   화성(花星)

햇빛을 받아야 살아가는 꽃들이 달빛 속에서 신명이 났다. 그들의 품새가 태양광 아래에서 분주히 움직이던 현실적인 모습과는 사뭇 다른 듯 보인다. 생산을 위한 경쟁도 생존을 위한 집착도 찾아볼 수 없는 매우 여유로운 모습이다. 그렇다, 그들은 지금 ‘삶을 살아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달빛을 즐기고 그 풍취를 만끽하면서 ‘삶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더운 열기도 시끄러운 소음도 잦아든 까만 밤이기에 달빛의 부드러운 포옹이 더욱 그리워진 것일까, 꽃들의 축제는 밤이 깊어질수록 더욱 흥겨워진다.

달님은 꽃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그냥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대상이라면 바로 꽃들이 그리워하는 ‘이상향(理想鄕, Paradise)일지도 모른다. 고요한 호수의 수면 위에서 부서지는 창백한 달빛 조각들보다 더 수많고 더 애절한 ‘꽃들의 염원들’이 까만 밤하늘에 초롱초롱 새겨져 있는 것이 보인다. 저 멀리에 있는 마음의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鄕愁, Nostalgia)때문에 꽃들은 이 깊은 밤에도 저토록 열정적으로 월광축제(月光祝祭)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인류에게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고픈 미련이 있듯이, 화류(花類)에게도 이와 흡사한 선험적(先驗的) 본능이 있는 것 같다. 달빛 아래에서라면 비록 자양분이라는 실리(實利)가 없어도 서로가 함께 하기에 저렇듯 흥에 겨울 수 있는 것은 바로 꽃들의 타고난 풍류(風流)인 듯싶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일까 달님도 벌써 밤하늘 저 높은 곳에 올라 교교히 그 매력을 사정없이 대지를 향해 쏟아 붓고 있다. 아! 달님은 꽃들의 별, 바로 화성(花星)인 것이다.

휘영청 밝은 달밤에 명경지수(明鏡止水)같이 고요한 호숫가에서 느껴지는 처연(悽然)하면서도 몽환적인 감정이, 해맑고 경쾌한 리듬 속에서 승화되고, 마지막에는 격정적인 열정을 원숙한 절제로 토해내는 ‘월광(月光) SONATA’의 피아노 선율이 이미 우리 주위를 휘감으며 밤의 향내와 더불어 은은히 울려 퍼지고 있다.

이 기사 좋아요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