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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천태종 전)총무원장 도정스님, 종교인에게 길을 묻다

편집부 | 기사입력 2014/09/01 [21:38]

불교 천태종 전)총무원장 도정스님, 종교인에게 길을 묻다

편집부 | 입력 : 2014/09/01 [21:38]


불교 천태종 전)총무원장 도정스님?

[내외신문=문광수기자] 천태종은 중국 천태산의 이름을 따서 만든 계파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고려 때 문종의 4째아들 의천대각 국사가 탑전에 가서 천태종을 우리나라에도 만들겠다고 해서 들어오게 됐다.?

이후 왕자가 천태종을 만들었다 해 활성화가 됐다가 조선시대에 사라졌다 우리나라가 해방되던 해인 1945년‘상월원가 대조사’ 라는 스님이 흥법호국과 구세제중의 염원을 펴기 위해 소백산 국망봉을 중심의 봉우리 가운데 연화지로 불리는 이곳에 사찰을 창건하며 대도를 이어 500여 년간 은물됐던 천태종을 이 땅에 다시 중창시켰다고 한다.


천태종을 중창조한 상월원각대조사는 칡덩굴로 얽어 만든 삼간초암을 짓고 뼈를 깎는 정진 끝에 대도를 성취 감로법우의 새 교화문을 열어 그 미묘한 법력과 도풍덕화를 쫓아 수많은 문법제자들이 그를 산부처라 부르며 운집하기 시작했다.

도정(道正)스님 구인사에 입산하게 된 동기

“제가(도정스님) 중학교 1학년 당시 부모님이 구인사에 다니시기 시작했는데 부모님과 함께 여름방학에 이 절에 와서 설법을 들었는데 정말 감명 깊게 들었어요”

“대중설법을 하시다가 제자들 3분을 놓고 설법을 하시는데 신통방통한 말씀만 하시고 이어 제자 분들이 릴레이방식으로 설법을 하는데 경이로운 마음마저 들게 돼 나도하면 된다 라는 생각으로 스님에게 빠져 입산하게 됐습니다”


“저의 부모님이 제산이 많은 분들이었는데 제가 입산하게 된 후 전 재산을 이곳에 쏟아 부으셨어요”


“68년도에 이곳 주지로 처음 왔는데 집이 초가집을 포함해 3~4채 정도 있었어요 제가 오고 나서 지금의 집이며 도량을 비롯한 박물관까지 완성하게 됐지요”


47년 전 도정 스님이 이곳에 왔을 때는 새 출발을 하는 시점이어서 불교 의식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또한 제대로 배울 수 없었고 길도 없어 식생활 해결도 큰 문제 였었다.


‘주경야선’으로 일구어 나간 구인사


“살면서 많은 고생을 해왔고 일과 기도를 열심히 했습니다”

도정?스님은 손수 산비탈을 깎아 길을 만들고 조금씩 법당을 지어가며 상상하지 못할 환경조건 속에서 오늘날을 만들었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정진수행을 하여 자립경제의 기반을 갖추는 주경야선의 생활을 통해 조금씩 발전해 나가면서 의식주가 해결이 되고 교육을 할 수 있는 여건도 마련이 돼 갔다.


“천태종은 결집력이 가장 좋은 종단으로 인식돼서 한국불교를 대표할 수 있는 입장이지만 짧은 역사로 만들어지기 까지 일들이 엊그제 같지만 많은 생활이 흘러 과거를 돌아보면 세월이 무상하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도정스님이 구인사를 만드는 일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겨울에 나무를 하러 갔는데 부잣집에서 자라다 보니 나무를 한 경험이 없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다들 나무를 했는데 하나도 하지 못해 그냥 빈 지게로 내려오는 어려움을 겪은 적도 있었어요”

“또 돌을 깎아 길을 만들면 수레를 갖고 한 번씩 움직여야 하는데 힘에 부쳐 넘어지기도 수십 번을 했습니다”

“하지만 여러 차례 수행을 한 결과 많은 일들이 정말 뜻대로 이뤄졌습니다”라며 흐뭇해했다.

상월원각대조사,타 종단과 차별화 된 새 불교 운동을 일으키다

천태종으로 중창될 당시 천태종이 가야할 3대 지표를 세웠다.


▲애국불교

상월원각대조사는 일제시대때 이리 저리 쫓겨 다니며 나라 없는 슬픔을 겪었기 때문에 나라가 없이는 종교도 없겠구나 하고 생각을 많이 했다. 그래서 항상 나라를 생각하는 애국불교를 주장함.

▲생활불교

과거 사찰하면 생각하는 잡소리 세속의 소리가 없는 산중에 사찰을 지어 생활하는 산중불교에서 벗어나 생활 속에서 어울려 깨우침을 얻을 수 있는 생활불교도 지표로 내세움.

▲대중 불교

나혼자가 아닌 더불어 모든 사람이 같이 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생활 속 대중과 함께 살 수 있는 새불교인 실천불교를 지향함

이를 계기로 만은 대중이 모여 들고 법력이 가르켜주는데로 하면 다 되게 됐다.

이렇게 구인사가 해결할 수 있는 입장이 되는 도량으로 알려지다 보니 250만 성도가 찾는 사찰이 됐으며 말사도 생기게 됐다.


도정스님은“돌이켜 보면 천태종 큰스님의 법력이 찾을 수 없는 어려운 일이다. 법력 위력이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라며 과거를 회상한다.

사회를 위해 던지는 메시지

경제랑 의식의 생각이 맞지 않는다.


짧은 역사 속에서 그 당시 경제가 어렵지만 마음, 인심은 후덕하게 이해하고 협조하고 살아왔는데 경제가 급작스레 성장하다 보니 마음이라는 자체가 모든 면에서 이기적이 됐다. 공격성을 띠며 혼돈한 새상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된다.


윤리 양심이라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경제가 갑작스레 성장해 모든 것이 망가졌다 생각한다.


살면서 인간의 근본적인 인간성을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을 교육하고 정서적이 훈련을 만들어서 인간이 지켜야 될 인간성이 있는 세상이 되야 하며 소통이 되기 위해서는 서로 살아야 하는 상생이 이뤄져야 하는데 그것을 위해서 남을 이해하고 배려를 할 줄 알아야 한다. 남을 깔보면서 서로 살자 하는 것은 안된다.

이해와 존경 협력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갔을 때 행복해지고 내가 행복 가정이 행복 가정이 행복 사회가 행복 사회행복이 국가가 행복해진다

나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협조 양보 등을 통해 이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도정 스님은“이정도로 만들어놨다는 자부심 수행을 통해 견디면서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눈을 떴다 생각한다”며 갈무리 했다.

한편, 도정스님은 살아오는 과정 종단의 모든 보직을 다 거쳤다. 서울 인천 등 총무원 서기부터 총무부장 감사원장 종회의장 총무원장 등을 두루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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