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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운초 김부용 묘 비지정문화재 (향토유적) 수난 위기

김용식 | 기사입력 2013/06/10 [15:35]

(기고) 운초 김부용 묘 비지정문화재 (향토유적) 수난 위기

김용식 | 입력 : 2013/06/10 [15:35]


 

김성열

천안역사문화연구실 실장

 

조선여류시기(朝鮮女流詩妓) 운초 김부용(雲楚 金芙蓉)은 1974년 천안지방에서 천안역사 문화재로 다시 살아났다. 조선시대 순조조에 활동했고 광덕산 기슭 산사골 179-1에 묻힌 해는 145년 전 1860년으로 추정된다.

 

운초 김부용은 많은 선비들에게 총애를 받으며, 개성 황진이, 무안 매창과 견주어지는 한시 350수를 남긴 성천시기이다. 당대 권세가 김이양 대감과 성천에서 시(詩)로 아름다운 사랑을 나눈 이야기가 시 속에 전해온다.

 

김이양 대감은 순조왕의 사돈으로 봉조하 벼슬을 한 안동 김씨의 문중 거두였다. 천안 광덕이 고향인 김대감은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떠나 외로울 때 김부용을 벗삼아 동행하고 광덕 부인 묘를 찾기도 했다.

 

당시 김부용(20세)과 김이양의(70세) 한시로 맺은 애틋한 사랑 이야기는 나이와 상관없는 아름다운 사랑을 전해주고 있다. 김 대감이 세상을 떠나자 김부용은 김이양 대감을 그리워하다 죽어 김 대감 가까이 광덕산 산사 기슭에 묻혔다.

 

김부용은 1974년 정비석 소설 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1975년부터 천안향토사계와 천안문협, 천안산악회에서 주관하여 40여 년 간 추모제를 이어온다.

 

천안향토문화연구회에서는 운초시집, 운초시와 문학세계, 운초 김부용전이 출간되기도 했다. 운초 김부용기념사업회(회장 김성렬)은 운초 김부용 묘가 지방 기념물로 지정되어 천안역사문화로 자리매김하여 전승되기를 40년 간 염원해왔다.

 

천안문협 (회장 김용순)이 주최 주관하는 추모제가 올 4월에도 광덕산 운초 묘역에서 거행되었다.

 

김부용의 수준 높은 한시 350수는 한국문단에서 새롭게 조명되고 천안문화기념자원으로 부각되고 있다. 이렇듯 깁부용 묘가 지방문화자원으로 지정받아 묘역 확보와 조경관리가 추진되어야 할 것이데, 어이없이 산주의 이장공고를 접해야 하는 위기에 처해 있다.

 

같은 처지의 전북 부안 출신 시기 매창은 “이화우 흩날릴 제” 시와 같이 전북도문화제 제65호로 지정되어 존경받고 있다. 가장 향토적인 것은 가장 민족적인 것이며 또 그것은 세계전인 것이라는 말이 있다. 지방문화시대에 문회유적을 제대로 간수 못 한다면 천안시민 체면 긍지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 생각해 본다.

 

큰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지역사회문화예술인들이 수수방관하는 것도 아니다. 이제는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서둘러 운초 김부용 묘를 문화재기념물로 지정해야 하겠다. 김부용의 생애나 작품세계를 끌어올려 의미를 부여해야 마땅한 일이라 하겠다.

 

이는 뿌리 찾기 운동의 일환이며 자화상의 정립 그리고 향토문화를 선양하는 길이라 보기 때문이다. 어떻든 귀중한 사료를 발견하고 유지 보존해온 이상 더 이상 지연시키지 말고 서들러 묘역을 확보하고 지방문화재 기념으로 지정하여 깔끔하게 유지 보존 관리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 고장이 더욱 품격 높은 문화도시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운초 김부용 묘가 있는 광덕산(179-1)은 광덕리 동내 공유산이었는데 40여년 전 서울 사람에게 매도되었는데, 전하는 말에 의하면 산속에 있는 묘는 제외되었다고 한다.

 

천안 광덕에서 140년 유지 보존되어온 향토유적이 몰지각한 시대에 와서 끝내 수난 위기를 맞았다. 강호제현들의 시대정신을 발로하라. 세도가 봉조하 김이양 대감의 묘역은 찾는 이 없이 잡초만 무성한데 한 시대 여류시인 김부용의 묘역은 많은 이들이 찾아주고 있다. 권세보다 시가 더 긴 세월을 이어가나보다.

 

당신의 빈 뜰에 쳐놓은 문발을 걷으며 이제 오시는 님은 바람이 아니고공연히 당신이 속는 그리움도 아니고깊디깊은 침묵이거니, 維歲次 님의 평화와 安息에 못 미침이니 산 아래 신발을 신고 온 우리 얼굴을님은 오늘 잠깐 실눈 뜨고보소서. -안수환의 분향시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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