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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역사는 전쟁의 역사..억압에서 자유로 향한 길①화

세금과 억압, 불만의 불씨가 된 설탕법과 인지세법
보스턴 차 사건과 강제법: 독립 운동의 촉발점
렉싱턴과 콩코드의 총성: 미국 독립 전쟁의 시작

김학영 기자 | 기사입력 2024/09/21 [08:39]

미국역사는 전쟁의 역사..억압에서 자유로 향한 길①화

세금과 억압, 불만의 불씨가 된 설탕법과 인지세법
보스턴 차 사건과 강제법: 독립 운동의 촉발점
렉싱턴과 콩코드의 총성: 미국 독립 전쟁의 시작

김학영 기자 | 입력 : 2024/09/21 [08:39]

영국과 아메리카 식민지 간의 관계는 7년 전쟁(1756~1763) 이후 급격히 악화되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프랑스로부터 광대한 북미 영토를 넘겨받으며 북미 대륙에서의 패권을 확고히 했지만, 그 과정에서 막대한 전쟁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영국 정부는 아메리카 식민지에 주둔하는 군대와 행정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식민지 주민들에게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로 인해 결국 독립 전쟁으로 이어지는 갈등이 촉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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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운센드법에 대한 반발은 식민지 전역에서 계속되었고, 저항은 더욱 거세졌다. 이 과정에서 아메리카 식민지와 영국 간의 충돌이 폭발한 사건이 바로 1773년 보스턴에서 일어난 ‘보스턴 차 사건’이다. 당시 영국은 ‘차법’을 통해 동인도 회사의 차를 식민지에 직접 판매할 수 있도록 하여 식민지 내 상인들의 경제적 피해를 초래했고, 이는 식민지 전역에서 불만의 목소리를 더욱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보스턴에서는 분노한 식민지 주민들이 인디언으로 변장해 항구에 정박한 동인도 회사의 배에 올라가 차 상자 342개를 바다에 던져버리며 저항의 뜻을 표했다.사진=유투브 화면 캡쳐    

 

1764년, 영국 정부는 처음으로 ‘설탕법’을 제정하여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수입되는 설탕, 포도주, 커피 등의 수입품에 관세를 부과했다. 설탕법은 식민지 경제에 큰 부담을 주었고, 이는 아메리카 식민지 상인들과 주민들의 불만을 키우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설탕법은 이후 발생할 더 큰 갈등의 서막에 불과했다. 1765년에 도입된 ‘인지세법’이 결정적으로 식민지 주민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 법에 따르면 모든 인쇄물, 신문, 계약서, 법률 문서, 심지어 카드 놀이에 사용되는 카드까지 영국 왕실의 인지세를 부과해야 했다. 특히 이 법은 식민지 주민들에게 "대표 없는 곳에 과세 없다"는 원칙을 위배한 것으로 여겨졌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이 세금이 자신들의 권리와 자유를 침해하는 불공정한 처사라고 강하게 반발했다.

 

인지세법에 대한 저항은 아메리카 전역에서 빠르게 확산되었다. 여러 지역에서 식민지 주민들이 항의와 시위를 벌였고, 상인들은 영국 제품에 대한 불매 운동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영국 정부는 1766년 인지세법을 폐지하기로 결정했지만, 식민지와 영국 간의 갈등은 이미 깊어지고 있었다. 영국 정부는 세금 징수를 포기할 수 없었고, 곧이어 ‘타운센드법’을 도입하여 식민지로 들어오는 종이, 유리, 페인트 등의 수입품에 다시 세금을 부과했다. 이 법은 식민지 주민들 사이에 더 큰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영국과의 관계는 갈등의 고비로 치닫게 되었다.

 

타운센드법에 대한 반발은 식민지 전역에서 계속되었고, 저항은 더욱 거세졌다. 이 과정에서 아메리카 식민지와 영국 간의 충돌이 폭발한 사건이 바로 1773년 보스턴에서 일어난 ‘보스턴 차 사건’이다. 당시 영국은 ‘차법’을 통해 동인도 회사의 차를 식민지에 직접 판매할 수 있도록 하여 식민지 내 상인들의 경제적 피해를 초래했고, 이는 식민지 전역에서 불만의 목소리를 더욱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보스턴에서는 분노한 식민지 주민들이 인디언으로 변장해 항구에 정박한 동인도 회사의 배에 올라가 차 상자 342개를 바다에 던져버리며 저항의 뜻을 표했다.

 

보스턴 차 사건은 영국 정부를 크게 자극했고, 이에 대한 응징으로 영국 의회는 식민지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강제법’을 제정했다. 강제법은 보스턴 항구를 폐쇄하고, 매사추세츠주 자치 정부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며, 영국 왕실이 직접 식민지 법과 질서를 통제하도록 했다. 그러나 영국 정부의 이러한 조치는 오히려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의 저항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보스턴 사건에 대한 처벌이 다른 식민지 지역까지 영향을 미치자, 식민지 주민들은 영국에 대한 공동의 대응을 모색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1774년 제1차 대륙회의가 필라델피아에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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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과 아메리카 식민지 간의 관계는 7년 전쟁(1756~1763) 이후 급격히 악화되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프랑스로부터 광대한 북미 영토를 넘겨받으며 북미 대륙에서의 패권을 확고히 했지만, 그 과정에서 막대한 전쟁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영국 정부는 아메리카 식민지에 주둔하는 군대와 행정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식민지 주민들에게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로 인해 결국 독립 전쟁으로 이어지는 갈등이 촉발된다    

 

제1차 대륙회의는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여 영국에 대한 저항의 목소리를 결집한 중요한 기회였다. 여기에는 조지 워싱턴, 존 애덤스, 벤자민 프랭클린 등 후에 독립 전쟁을 이끌 지도자들이 참석해 영국의 강제법에 맞서 싸우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대륙회의에서는 영국 정부에 강제법 철회를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식민지 주민들이 자치적으로 통치할 권리를 주장했다. 이로써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은 더 이상 단순한 세금 저항 운동을 넘어, 자신들만의 정치적 독립을 향한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1775년 4월, 매사추세츠 렉싱턴과 콩코드에서 처음으로 영국군과 식민지 민병대 사이에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렉싱턴에서의 첫 발포는 ‘세계의 운명을 바꾼 첫 발포’라고 불리며, 이는 미국 독립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당시 영국군은 매사추세츠 지역에서 무기와 군수품을 압수하고 식민지 지도자들을 체포하려고 했으나, 이를 사전에 알아차린 식민지 민병대가 맞서 싸우며 영국군을 몰아냈다. 렉싱턴에서의 충돌 이후 콩코드에서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졌고, 이 전투에서 민병대는 영국군에 상당한 타격을 입히며 전쟁 초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는 독립을 향한 식민지 주민들의 결의를 더욱 확고히 하였으며, 이후 식민지 전역에서 민병대가 결성되고 영국에 맞서 싸우기 위한 준비가 본격화되었다.

 

이후 1776년 7월 4일, 제2차 대륙회의에서 식민지 지도자들은 마침내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며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공식 선언했다. 이 선언서는 토마스 제퍼슨이 주도하여 작성되었으며,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창조주로부터 부여받은 불가침의 권리를 지닌다"는 문구로 시작한다. 독립 선언서는 식민지 주민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고, 이들은 이제 자신들의 권리와 자유를 지키기 위한 전쟁을 본격적으로 벌이게 된다.

 

영국은 독립 선언에 맞서 대규모 군대를 북미 대륙에 파견하며 식민지의 저항을 진압하려 했다. 영국군은 수적 우위와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전쟁 초반 우위를 점했으나, 조지 워싱턴이 이끄는 대륙군은 게릴라 전술을 통해 효과적으로 맞섰다. 대륙군은 프랑스의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점차 전세를 역전시키기 시작했다. 특히 1777년 사라토가 전투에서 대륙군이 영국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면서 전쟁의 흐름은 크게 바뀌었다. 이 승리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스페인과 네덜란드까지 미국을 지원하게 만드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영국은 점점 더 고립되기 시작했다.

 

1781년, 미국 독립 전쟁의 결정적 승리가 된 요크타운 전투에서 조지 워싱턴의 지휘 아래 대륙군과 프랑스 연합군은 영국군을 완전히 포위하고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콘월리스 장군이 항복함으로써 전쟁은 사실상 끝이 났다. 이후 1783년 파리 조약이 체결되면서 영국은 공식적으로 미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미시시피 강 동쪽의 영토를 미국에 할양했다.

 

미국 독립 전쟁은 단순히 세금 문제에서 비롯된 갈등이 아니었다. 식민지 주민들은 영국 정부의 억압에 맞서 자신들의 권리와 자유를 지키기 위한 투쟁을 벌였고, 이를 통해 독자적인 사회와 정치 체제를 형성해 나갔다. 또한 이 전쟁은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와 자유의 상징이 되었으며, 이후 여러 국가들이 독립을 꿈꾸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은 이 전쟁을 통해 '자유의 나라'라는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었고, 세계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했다.

 

미국 독립 전쟁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역사적인 투쟁이었다. 영국의 강제적인 통치와 세금 정책은 식민지 주민들을 독립의 길로 이끌었고, 결국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며 새로운 국가로서의 첫걸음을 내딛었다. 이 과정에서 조지 워싱턴과 같은 뛰어난 지도자들의 리더십, 프랑스와의 국제적 연대, 그리고 식민지 주민들의 결집된 저항이 미국 독립을 가능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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