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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벌진트 비욘드 K-Pop 공연

이종학 | 기사입력 2013/09/02 [10:42]

버벌진트 비욘드 K-Pop 공연

이종학 | 입력 : 2013/09/02 [10:42]


랩이라면 내가 아는 가수는 에미넴이 전부다. 그런데 백인이다. 랩이 흑인 것이라고 하면 약간 아귀가 맞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를 보니, 디트로이트의 빈민굴에서 거의 짐승처럼 살아온 그의 삶과 거칠게 쏟아내는 랩이 정말 잘 어울린다. 또 그를 통해 랩의 지평을 넓어지고, 많은 대중을 끌고 왔다는 데엔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한국의 가요계에 이런 장르의 재미나 맛을 널리 전파하는 버벌진트의 존재는 각별하다.

 

그런데 막상 버벌진트를 실물로 보니 에미넴보다 열 배는 잘 생겼고, 백 배는 섹시하다. 처음부터 작심하고 영화쪽으로 나갔으면 원 빈 못지 않은 스타가 될 것도 같다. 그러나 그는 음악을 한다. 그것도 한국에서 아주 생소한 랩을 바탕으로 말이다.

 

얼마 전 8월 29일, 청담 CGV의 M-Cube 관에서 열린 버벌진트의 공연은 애초부터 기대하지 않았다. 랩이라는 장르의 특성상, 제 멋에 겨워 흥얼거리고, 빠르게 가사를 쏟아내는 퍼포먼스가 전부일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또 이미 장기하의 무대로 1시간을 기분좋게 보냈으므로, 두 번째 공연은 어쩔 수 없이 김이 새기 마련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버벌진트가 나왔다. 객석을 가득 매운 여성 팬들 사이에 가벼운 술렁거림이 일었다. 일부는 사진 찍느라 열중일 정도. 확실히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그는 뭔가가 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암시해왔다. 나도 조금씩 집중하며 그의 공연을 감상했다.

 

래퍼나 피쳐링으로 유명한 버벌진트지만, 실제로 음악을 들으니 그리 낯설지 않다. 개인적으로 해비 메탈과 랩을 지독히 싫어하지만, 이런 사운드라면 흥미가 간다. 차츰 듣다 보니, 이 친구, 기본이 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미디엄 템포의, 아주 듣기 좋은 리듬이다. 무엇보다 사람이 치는 드럼과 베이스, 기타 등이 주류를 이뤄 안심이 된다. 기계로 찍은 리듬은 내게 매우 불편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20대 초반으로 이뤄진 이 밴드의 실력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덥수룩한 수염만 보면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 연령대이지만, 안정적이고, 차분하며, 활기가 있다. 앵콜 곡을 연주할 때 잠깐 기타리스트의 애드립 시간이 주어졌는데, 역시 록을 바탕으로 한 화려한 프레이즈가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러고 보면 이쪽 세계의 수준이나 높이가 만만치 않다. 그만큼 라이브 무대를 다채롭게 꾸밀 수 있는 배경이 조성되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사실 랩에서는 라임이냐 플로어냐 따지는 모양인데, 라이브에서 중요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아무리 마이크가 좋고, 믹싱이 뛰어나도 일반적으로는 강력한 외침이나 반복되는 구호 외에는 잘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미리 곡을 듣고, 내용을 알아두지 않으면, 이런 라이브에선 약간 어색할 수가 있다. 통상 클래식 콘서트에 갈 때 레퍼토리를 미리 들어두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하겠다.

 

앵콜곡을 포함해 이번 공연에서 부른 것은 총 다섯 곡. 앵콜곡만 빼면 네 곡은 화영이라는 가수가 노래하고, 버벌진트가 중간중간 랩을 섞는 형식이다. 이런 구성은 과거 레드 핫 칠리 페퍼스나 린킨 파크에서 찾아볼 수 있는 바, 랩과 록의 하이브리드라고나 할까  버벌진트의 경우, 진한 흑인 필링과 음색을 갖춘 화영을 통해, 록보다는 흑인 음악, 그러니까 소울쪽의 느낌을 더 강하게 풍기고 있다. 어쨌든 서서 키보드를 치며, 랩을 하는 버벌진트의 매력은, 화영이라는 강력한 보컬과 어우러져 훨씬 강화되고 있다.

 

첫 곡 부터 등을 듣는 내내, 나는 묘한 느낌을 하나 받았다. 이런 음악은 주로 언더그라운드에서 시작해 아무래도 강한 저항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데, 여기서는 지극히 세련되고, 감각적이다. 하긴 2000년대에 들어와 랩도 이런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고 하니, 초창기의 거친 모습만 기억하는 내게는 생소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럭셔리한 느낌은 역시 버벌진트만이 갖는 강점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객석이 그렇게 많은 여성 팬들이 포진한 것일까?

 

또 곡에 넣는 매세지도 강력해서, 매 맞는 아내를 묘사한 라든가 술 취한 남자의 횡설수설을 담은 등, 곱씹어 볼 내용도 많다. 단순한 데이트 용 음악은 아닌 것이다.

 

마지막으로 감동한 것은 앵콜 곡. 직접 노래를 불렀는데, 그 음색이 상당히 매혹적이다. 가벼운 발라드 넘버지만, 색깔이 진하다. 아무리 랩을 해도 기본적으로 가수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대목이다. 이 정도 솜씨라면 게스트 없이 한번 직접 노래해보는 게 어떨까 싶다. 실제로 랩과 노래를 모두 아우를 수 있는 가수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번 라이브를 직접 찾은 팬들만이 즐길 수 있었던 깜짝 쇼가 아닐까 한다. 풍부한 감성과 세련된 이미지로 한껏 뻗어갈 수 있는 재능을 갖춘 뮤지션이라 향후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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