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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고대 문명에서 현대까지, 유럽 5천 년의 이야기①화

김학영 기자 | 기사입력 2024/09/14 [11:18]

[기획] 고대 문명에서 현대까지, 유럽 5천 년의 이야기①화

김학영 기자 | 입력 : 2024/09/14 [11:18]

◆기원전 20세기~기원전 12세기: 에게 문명과 미케네 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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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아시아 문명의 영향을 받은 에게 문명은 에게해와 그리스 본토에서 청동기 문명으로 발달했다. 특히, 기원전 20세기경 크레타 섬에서는 해상 무역과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크노소스 궁전을 비롯한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다. 그러나 기원전 14세기경 미케네인이 그리스 본토를 장악해 미케네 문명을 이루었고, 결국 철기를 사용하는 도리스인의 침입으로 이 문명은 멸망했다.    

 

기원전 20세기, 에게해를 중심으로 서아시아의 영향 아래 형성된 찬란한 청동기 문명이 번성했다. 그중에서도 크레타 섬은 에게해 문명의 중심지로 떠오르며, 지중해의 무역 허브로 활약했다. 이 시기 크레타 섬을 중심으로 한 문명은 '미노스 문명'으로 불리며, 강력한 왕권과 해상 무역을 기반으로 크게 번영했다. 크레타의 궁전은 특히 '미궁'으로 유명한 크노소스 궁전이 대표적이다. 복잡한 구조와 아름다운 벽화, 금은 세공품 등으로 당시의 풍요로운 문화를 엿볼 수 있다. 또한 도기와 공예품들은 미노스 문명의 예술적 감각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찬란한 문명도 무너지지 않을 수 없었다. 기원전 14세기경, 그리스 본토에서 남하해 온 미케네인이 에게해를 장악하면서 새로운 주인공이 등장했다. 미케네인은 그리스 본토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문명을 이끌었고, '미케네 문명'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미케네 문명은 크레타의 문화를 흡수하면서도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미케네인들은 강력한 요새와 궁전을 건설했고, 전사 중심의 문화를 강조했다. 특히, 미케네 궁전에서 발견된 부장품과 무덤은 그들의 군사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미케네 문명도 영원하지 않았다. 기원전 12세기경, 북쪽에서 철기를 사용하는 도리스인의 침입으로 미케네 문명은 결국 멸망하게 된다. 도리스인의 등장으로 에게 문명은 종언을 맞이하고, 그리스는 새로운 철기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이 두 문명은 이후 그리스 문명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그들의 영향력은 고대 그리스 예술과 문화의 뿌리로 남아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에게 문명과 미케네 문명은 단순한 고대 문명이 아닌, 유럽 문명의 탄생을 이끈 위대한 선구자로 기억된다.

 

 

◆기원전 10세기~기원전 5세기: 그리스 폴리스와 고대 그리스의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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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는 지형적 특성 때문에 통일된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여러 촌락이 방어를 위해 성을 쌓으면서 도시국가 ‘폴리스’가 등장했다. 아크로폴리스와 아고라를 중심으로 발전한 폴리스는 그리스인의 생활과 문화의 중심이었으며, 아테네와 스파르타 같은 대표적인 폴리스가 각각 다른 방식으로 발전했다. 기원전 5세기경에는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가 승리하며 아테네를 중심으로 민주정치와 문화의 전성기를 맞았다.    

 

그리스의 도시국가 '폴리스', 고대 세계를 빛내다

 

기원전 10세기, 그리스는 산악지형과 바다에 둘러싸여 자연스럽게 작은 도시국가, '폴리스'가 탄생했다. 그리스는 지형적 특성상 통일된 국가를 이루기 어려웠기 때문에, 각 지역에 독립적인 도시국가들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폴리스들은 각각 자치권을 가지고 독립적인 정치체제를 운영했으며, 대표적인 폴리스로는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있었다. 

 

폴리스의 중심, 아크로폴리스와 아고라

 

그리스 폴리스의 구조는 매우 독특했다. 모든 폴리스는 방어를 위한 높은 언덕 '아크로폴리스'를 중심으로 건설되었다. 아크로폴리스는 종교적 성지이자 외부의 침입을 방어하는 최후의 보루 역할을 했다. 아크로폴리스 아래에는 시민들이 모이는 공공광장인 '아고라'가 자리 잡았다. 아고라는 그리스 시민들의 일상적 소통과 교류의 공간이자 상업과 정치적 토론의 중심지였다. 이러한 도시 구조는 그리스 폴리스의 정치, 사회, 경제 활동의 중심을 이룬 중요한 요소였다.

 

아테네의 민주주의, 스파르타의 군국주의

 

그리스의 두 대표적인 폴리스인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전혀 다른 정치체제와 문화를 발전시켰다. 아테네는 상공업이 발전함에 따라 부유한 평민들이 중장보병으로 군사에 참여하면서 점차 귀족과의 갈등이 생겨났다. 이를 조정하기 위해 기원전 6세기 솔론이 금권정을 도입하고, 클레이스테네스가 민주주의의 기틀을 다지며 아테네는 점차 민주정으로 발전했다. 모든 성인 남성 시민이 참여하는 민회가 최고 입법 기관이 되었고, 추첨을 통해 시민들이 공직을 맡게 되는 등 직접 민주주의가 꽃을 피웠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적 권리는 성인 남성 시민에게만 제한되었고, 여성, 노예, 외국인은 제외되었다.

 

반면, 스파르타는 강력한 군사 체제를 중심으로 한 국가였다. 스파르타는 도리스인에 의해 세워졌으며, 정복한 원주민들을 예속 농민으로 삼고, 소수의 시민들이 이들을 통제하기 위해 어릴 때부터 군사 훈련을 받았다. 남성 시민들은 어릴 때부터 공동생활과 군사 훈련을 받으며, 스파르타는 강력한 군국주의 국가로 성장했다. 스파르타 시민들은 국가의 군사적 요구에 철저히 맞추어진 삶을 살았으며, 오직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것을 최우선 가치로 삼았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그리스의 승리와 아테네의 전성기

 

기원전 5세기, 그리스는 페르시아 제국과의 대규모 전쟁에 휘말렸다.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는 서아시아를 정복한 후 지중해로 세력을 확대하려 했고, 이에 맞서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폴리스들이 연합해 방어에 나섰다. 마라톤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 같은 중요한 전투에서 그리스는 페르시아에 맞서 승리를 거두었고, 이를 통해 그리스는 지중해 패권을 지키게 되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후,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의 맹주로 떠오르며 그리스의 주도권을 잡았다. 아테네는 전쟁의 승리를 바탕으로 강력한 해상 제국으로 성장했고, 특히 페리클레스 시대에는 민주주의와 문화가 황금기를 맞이했다. 아테네는 수당 제도를 도입해 가난한 시민들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하고, 추첨을 통해 시민들이 관직을 맡도록 하는 등 모든 시민에게 평등한 정치 참여의 기회를 제공했다. 또한 이 시기, 아테네는 철학, 문학, 연극, 예술 등에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며 고전 그리스 문화의 정점을 이루었다.

 

폴리스의 경쟁과 펠로폰네소스 전쟁 

 

그러나 아테네의 부상은 스파르타와의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아테네가 델로스 동맹을 통해 그리스 전역에 영향력을 확대하자, 스파르타가 주도하는 펠로폰네소스 동맹과의 경쟁이 심화되었다. 결국 기원전 431년, 두 동맹 간의 갈등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 전쟁에서 스파르타는 승리를 거두었으나, 그리스 전역은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졌고, 폴리스들 간의 세력 균형은 무너졌다. 그 결과, 그리스 세계는 점차 쇠퇴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고, 결국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에 의해 정복되며 고대 그리스 폴리스의 시대는 종말을 맞이했다.

 

기원전 10세기부터 기원전 5세기까지, 그리스의 폴리스는 정치, 문화, 철학 등에서 찬란한 성과를 이루며 고대 세계를 주도했다. 그리스의 민주주의와 시민 중심의 문화는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치며 서양 문명의 기틀을 다졌다.

 

◆기원전 4세기~기원전 1세기: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헬레니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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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4세기, 북쪽의 마케도니아 왕국이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지휘 아래 그리스 폴리스를 굴복시키고, 페르시아 제국까지 정복하면서 동방 원정을 시작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를 해방하고 인더스강까지 진출했지만 병사들의 피로와 반란으로 인해 기원전 323년 회군하게 된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후 헬레니즘 시대가 열리며 그리스 문화와 동방 문화가 융합된 헬레니즘 문화가 발달했다.    

 

기원전 4세기, 그리스 북쪽의 마케도니아 왕국이 세계사의 주역으로 급부상했다. 필리포스 2세는 마케도니아를 강력한 군사 국가로 만들고, 기원전 338년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그리스의 주요 폴리스를 굴복시켰다. 이로써 그리스는 마케도니아의 지배 아래 들어갔고,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페르시아 제국을 무너뜨린 알렉산드로스의 대원정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아버지 필리포스 2세가 계획한 동방 원정을 실행에 옮겼다. 그는 기원전 334년 헬레스폰트 해협을 건너 페르시아 제국을 향한 대규모 원정을 시작했다. 첫 전투인 그라니코스 전투에서 승리한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를 상대로 연승을 거두며 점차 영토를 넓혀갔다. 기원전 333년에는 이소스 전투에서 다리우스 3세가 이끄는 페르시아 군을 크게 무찌르며 전쟁의 주도권을 잡았다.

알렉산드로스의 정복은 단순한 군사적 승리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기원전 332년 이집트를 해방시키고, 이집트인들로부터 구원자로 추앙받았다. 이집트에서 알렉산드로스는 나일강 삼각주에 새로운 도시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며 그리스 문화를 현지에 전파하고, 새로운 문명 교류의 거점으로 삼았다. 이후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제국의 심장부로 진격, 기원전 331년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다리우스 3세를 완전히 무찌르고,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 페르세폴리스를 점령했다. 이로써 아케메네스 왕조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알렉산드로스는 동서양을 잇는 세계 최대의 제국을 세웠다.

 

인더스강까지 이른 정복, 그러나 병사들의 피로로 회군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한 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그는 기원전 326년 인도 북서부의 인더스강 유역까지 진출하며 정복을 이어갔다. 하지만 고향을 떠나 오랫동안 전쟁을 치러 온 그의 병사들은 더 이상 동쪽으로 나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병사들의 피로와 전투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자, 알렉산드로스는 결국 회군을 결정했다. 기원전 323년, 그는 바빌론에서 돌아오던 중 갑작스러운 열병에 걸려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알렉산드로스의 죽음과 헬레니즘 시대의 개막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사망한 후, 그의 거대한 제국은 장군들 사이에서 분열되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가 이룬 업적은 단순한 정복을 넘어섰다. 그의 원정으로 그리스 문화와 동방 문화가 융합된 새로운 문화가 탄생했는데, 이를 '헬레니즘 문화'라고 한다. 헬레니즘 문화는 그리스의 합리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문화와 동방의 다양한 종교와 사상, 예술이 결합되어 독특한 성격을 띠게 되었다. 알렉산드로스가 건설한 도시 알렉산드리아는 이러한 문화적 융합의 중심지로 발전하며, 학문과 예술, 과학이 크게 꽃피운 도시로 성장했다.

헬레니즘 시대는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의 죽음부터 기원전 30년까지 약 300년간 이어졌다. 이 시기에는 철학, 자연과학, 예술에서 큰 발전이 이루어졌고, 특히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 같은 철학이 개인의 행복과 삶의 지혜를 탐구했다. 또한, 헬레니즘 미술은 인간의 감정과 육체를 사실적으로 표현한 관능적인 미를 추구했으며, 헬레니즘 문화는 이후 로마 제국과 유럽, 아시아 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과 헬레니즘 시대는 고대 세계에 큰 전환점을 만들었고, 오늘날까지도 그의 유산은 세계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기원전 8세기~기원전 1세기: 로마 공화정의 탄생과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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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는 기원전 8세기 중엽 라틴족에 의해 건설된 후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전환했다. 기원전 3세기, 로마는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서지중해의 패권을 잡았고, 이후 마케도니아, 그리스, 아나톨리아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그러나 대회 팽창으로 인한 사회 문제와 내전으로 로마 공화정은 혼란에 빠졌다    

 기원전 8세기 중엽, 라틴족은 이탈리아 반도의 테베레강 하류에 작은 도시국가를 세웠다. 이 도시국가가 바로 로마의 기원이다. 초기 로마는 왕정을 기반으로 한 작은 왕국이었지만, 기원전 509년, 로마 귀족들은 마지막 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를 축출하며 왕정을 끝내고 공화정을 수립했다. 이 사건은 로마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귀족과 평민이 정치적 권력을 나누는 복잡한 공화정 체제가 시작되었다.

 

귀족과 평민의 신분 투쟁: 평민권 확대의 역사


공화정 초기, 로마의 정치 권력은 주로 귀족층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귀족으로 구성된 원로원이 로마의 주요 정책을 결정했으며, 집정관 또한 귀족이 독점했다. 그러나 상공업의 발전과 함께 중산층 평민들이 군사적 역할을 강화하면서, 정치적 권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로마는 ‘신분 투쟁’이라는 오랜 갈등의 시기를 겪었다.

 

평민들은 정치적 평등을 위해 여러 차례 파업을 벌였고, 그 결과 기원전 494년에 평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호민관직이 설치되었다. 호민관은 평민의 이익을 대변하며, 귀족의 권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후 기원전 451년에는 평민들이 법적 평등을 보장받기 위해 ‘12표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은 로마의 최초의 성문법으로, 귀족과 평민 모두에게 법 앞에서의 평등을 규정한 중요한 법적 기초가 되었다.

 

기원전 367년에는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이 통과되면서, 집정관 중 한 명은 평민이 선출될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기원전 287년 포에텐시우스 법이 통과되면서 평민회의의 결의가 로마의 법적 구속력을 가지게 되어, 평민들은 법적·정치적으로 귀족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게 되었다.

 

로마의 대외 팽창: 지중해 패권을 차지하다


로마 공화정이 내부적으로 정치적 안정을 찾아가는 동안, 대외적으로는 공격적인 팽창 정책을 펼치며 이탈리아 반도에서 세력을 확대했다. 기원전 3세기 전반에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정복하였고, 이후 로마는 서지중해의 강력한 해상 국가 카르타고와 마주하게 되었다.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는 세 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이 벌어졌다. 특히 기원전 218년에 시작된 제2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 역사상 가장 큰 위기였다.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이 이끈 군대가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반도로 진군하며 로마에 위협을 가했다. 그러나 로마는 이 위기를 극복했고, 기원전 202년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을 물리치며 전쟁에서 승리했다. 이 승리로 로마는 서지중해의 패권을 잡았고, 카르타고를 완전히 제압했다.

 

이후 로마는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며 동지중해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로마의 정복은 멈추지 않았고, 기원전 1세기에는 소아시아와 이집트까지 정복하며 지중해를 ‘로마의 바다’로 만들었다.

내부 갈등과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로마의 대외 팽창으로 막대한 전리품과 노예가 들어오면서, 사회 내부에는 큰 변화가 발생했다. 귀족들은 방치된 농지를 대규모로 매입해 노예 노동을 바탕으로 대농장인 라티푼디움을 운영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그러나 중소 자영농들은 전쟁으로 인해 농토를 잃고 몰락하게 되었고, 로마에는 빈민이 급증했다.

 

이러한 사회적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 호민관에 선출된 그라쿠스 형제는 개혁을 시도했다. 기원전 133년,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대농장 운영을 제한하고 빈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농지법’을 제안했다. 그러나 귀족들의 반발로 그는 암살당하고 말았다. 그의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형의 뜻을 이어받아, 곡물법을 통해 빈민들에게 저렴한 곡식을 제공하고, 로마 시민권을 확대하는 개혁을 시도했으나,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이로 인해 로마 사회는 점차 귀족과 평민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내전과 카이사르의 등장, 공화정의 종말로 향하다


로마 내부의 정치적 혼란은 곧 내전으로 이어졌다. 귀족파와 평민파가 권력 투쟁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여러 군사 지도자들이 등장했다. 그중 갈리아를 정복하며 큰 명성을 얻은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49년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해 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카이사르는 로마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고, 다양한 개혁을 시도했다.

 

그는 빈민 구제를 위한 정책을 펼치고, 달력 개혁을 통해 오늘날까지 쓰이는 율리우스력을 도입했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권력이 절대적으로 강화되자, 공화정의 전통을 중시하는 세력들은 그를 왕으로 등극하려 한다는 의심을 품게 되었다.

 

결국 기원전 44년, 카이사르는 원로원의 음모에 의해 암살당하고 말았다. 그의 죽음은 로마 공화정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으며, 이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주도하는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옥타비아누스와 제정의 시작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떠오른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를 물리치고 로마의 지배권을 장악했다.

 

그는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으며 로마의 첫 번째 황제가 되었다. 비록 옥타비아누스는 공화정의 여러 제도를 유지하려 했으나, 실질적으로 그는 군사적, 정치적 권력을 독점하며 제정 로마의 첫 번째 통치자로 자리 잡았다. 이로써 로마 공화정은 종말을 맞이하고, 약 500년에 걸친 공화정 시대는 끝을 맺게 된다.

 

로마 공화정의 발전은 단순한 도시국가에서 시작해 지중해를 지배하는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과정이었다. 이 시기에 이루어진 법률, 정치, 사회적 개혁들은 후대 유럽의 정치 체제와 법률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로마는 이제 제국으로 거듭나기 위한 마지막 단계를 밟고 있었다.

 

◆기원전 1세기~서기 3세기: 로마 제국의 팍스 로마나와 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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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1세기, 옥타비아누스는 내전에서 승리해 로마의 지배자가 되었고,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아 사실상 황제가 되었다. 이로써 로마 제정이 시작되었으며, 이후 약 200년간 ‘팍스 로마나’라 불리는 정치적 안정과 번영의 시대가 열렸다. 로마 제국은 법률, 건축, 도시 설계 등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로마법은 훗날 세계 각국의 법 체계에 영향을 미쳤다.    

 기원전 1세기 말, 로마는 혼란 속에서 제국으로의 변모를 이루었다. 기원전 27년,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으며 로마의 첫 황제가 되었고, 이로써 500년에 가까운 로마 공화정은 막을 내리고 제정 시대가 열렸다. 아우구스투스는 공화정의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여, 정치적 안정을 가져왔다. 그의 통치 아래 로마 제국은 번영의 시대로 접어들었고, 이를 '팍스 로마나(Pax Romana)', 즉 '로마의 평화'라 부른다.

 

아우구스투스의 개혁과 제국의 안정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27년부터 서기 14년까지 약 40여 년간 로마 제국을 통치하며, 내전과 혼란으로 황폐해진 로마를 부흥시켰다. 그는 군사적, 행정적 개혁을 통해 로마 제국의 경계를 안정시키고, 로마의 번영을 이루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국경을 강화하고, 제국 전역에 효율적인 통치 구조를 도입했다. 또한, 병사들에게 토지를 나눠주는 등 군대의 충성심을 강화했으며, 로마의 경제를 재건해 안정적인 세금 수입을 보장했다.

 

특히, 그는 정복지 곳곳에 로마 식민 도시를 건설하고 도로망을 정비해 제국의 모든 지역이 하나로 연결되도록 했다. 로마는 이 도로망을 통해 군사적, 상업적, 행정적 유대를 강화하며 지중해 전역을 통제했다. 이러한 정책 덕분에 로마는 지중해를 "우리의 바다(Mare Nostrum)"라 부르며, 전쟁과 내전 없이 약 200년간 지속된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누릴 수 있었다.

 

팍스 로마나의 번영과 사회적 안정


'팍스 로마나' 시기는 단순한 평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시기는 로마 제국이 정치적 안정 속에서 경제적 번영을 구가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로마는 광대한 영토에서 풍부한 자원을 얻었고, 상업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특히, 이집트의 곡물은 로마 시민들을 먹여 살렸고,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각지에서 귀금속과 향신료가 무역을 통해 들어왔다. 로마는 이러한 풍부한 자원과 무역을 바탕으로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다.

이 시기에는 법률과 건축 등 실용적인 분야에서도 큰 발전이 이루어졌다. 아우구스투스 이후 후대 황제들은 로마 전역에 도로, 수로, 공중 목욕탕, 원형 경기장 같은 공공 시설을 세우며 시민들에게 편리함을 제공했다.

 

특히,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시내에 수도교와 수로망을 확충해 시민들에게 깨끗한 물을 공급했고, 공공 목욕탕을 통해 위생을 개선했다. 또한, 콜로세움과 같은 대규모 경기장은 로마 시민들에게 오락과 여가를 제공하며, 로마의 문화와 위엄을 과시했다.

 

법률 분야에서도 발전이 이루어졌는데, 로마는 시민법에서 출발해 만민법으로 발전한 법률 체계를 구축했다. 로마법은 제국 내 모든 자유민에게 적용되었고, 훗날 세계 각국의 법 체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법률 체계는 로마의 가장 중요한 유산 중 하나로, 현대에도 법률의 기초로 여겨지고 있다.

 

오현제 시대: 로마 제국의 절정기


팍스 로마나의 절정은 '오현제 시대(五賢帝)'로 불리는 2세기에 이르렀다. 오현제는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우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로 이어지는 황제들을 일컫는 말로, 이들은 로마 제국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특히 트라야누스 황제(재위: 98년~117년)는 로마 제국의 영토를 최대치로 확장했다. 그는 다키아(현재의 루마니아 지역)를 정복하고, 파르티아 전쟁에서 승리해 메소포타미아 지역까지 정복했다. 이로써 로마 제국은 유럽, 북아프리카, 중동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게 되었다. 트라야누스는 식민 도시를 세우고, 정복한 지역에 도로와 행정 체계를 확립해 로마의 영향력을 더욱 넓혔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재위: 117년~138년)는 팽창을 멈추고 제국의 경계를 방어하는 데 집중했다. 특히, 영국 북부에 '하드리아누스 성벽'을 건설해 북쪽으로부터의 침입을 막았다. 또한, 하드리아누스는 로마 제국의 전역을 순찰하며 행정과 군사 체제를 정비하고, 법률과 공공 정책을 강화해 제국의 안정을 도모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재위: 161년~180년)는 철학자 황제로 알려져 있으며, 스토아 철학을 바탕으로 이성적이고 절제된 통치를 했다. 그는 『명상록』을 저술하며, 철학적 사유와 정치적 이상을 결합한 독특한 통치 철학을 남겼다. 그의 통치 아래 로마는 번영을 이어갔지만, 그의 재위 말기에는 제국의 북쪽 경계에서 게르만족의 침입이 시작되며 로마는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팍스 로마나의 끝자락, 다가오는 위기


로마 제국은 약 200년간 지속된 평화와 번영을 누렸지만, 3세기에 이르러 점차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팍스 로마나의 끝자락에서 내부적 갈등과 외부의 침입이 서서히 로마의 위기를 예고했다. 3세기 중반부터 '군인 황제 시대'가 시작되며, 군대의 지지가 황제 선출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고, 황제들이 군사력에 의존하는 불안정한 정세가 펼쳐졌다.

 

팍스 로마나는 로마 제국의 황금기였으며, 이 시기에 이루어진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은 로마의 문화를 절정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이 평화는 영원하지 않았다. 로마 제국은 외부의 침입과 내부의 혼란 속에서 점차 그 힘을 잃어갔고, 그로 인해 팍스 로마나는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서기 3세기~서기 5세기: 로마의 쇠퇴와 크리스트교의 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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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세기부터 로마는 군인 황제 시대와 외부의 침입,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혼란에 빠졌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개혁을 시도했으나, 로마 제국의 해체를 막지 못했고, 결국 395년 로마 제국은 동서로 분리되었다. 서로마 제국은 476년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멸망했다.    

 

서기 3세기, 로마 제국은 더 이상 팍스 로마나의 평화와 번영을 유지할 수 없었다. 급격한 내부 갈등과 외부의 침략으로 인해 로마는 흔들리기 시작했고, 제국은 군사력과 경제, 정치적 안정성을 잃어갔다. 이 시기를 흔히 '군인 황제 시대'라고 부른다. 황제들은 군대의 지지를 얻기 위해 끊임없이 권력 싸움을 벌였고, 제국의 통치 체제는 점점 불안정해졌다. 한편, 이러한 혼란 속에서 새로운 종교인 크리스트교가 로마 전역에 확산되며 제국의 문화와 질서를 바꾸어갔다.

 

3세기 위기: 군인 황제 시대의 혼란


서기 235년, 로마는 세베루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암살당하면서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이후 로마는 약 50년간 군사력에 의해 황제가 자주 교체되는 '군인 황제 시대'를 맞이했다. 이 시기 동안 로마는 약 50명의 황제가 등장했지만, 이들은 모두 짧은 기간 동안만 통치했고, 내부 권력 다툼과 외부의 침입에 시달렸다. 특히, 게르만족과 사산 제국의 침입이 심각한 위협이었으며, 로마는 국경 방어에 어려움을 겪었다.

 

경제적으로도 큰 타격이 있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전리품과 노예 공급이 줄어들면서, 로마의 경제는 침체되었다. 화폐 가치는 급격히 떨어졌고, 인플레이션이 심화되었으며, 도시의 상업과 산업은 쇠퇴했다. 또한 농촌에서는 부유한 지주들이 몰락한 소작농을 이용해 대농장을 경영하는 '콜로나투스' 제도가 확산되면서, 중산층 자영농 계층은 사라지고 로마의 경제 기반이 무너졌다.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의 개혁


로마 제국이 쇠퇴의 길로 들어서자, 이를 해결하기 위한 개혁이 필요했다. 3세기 후반,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재위: 284년~305년)는 로마의 쇠퇴를 막기 위해 강력한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제국을 동서로 나누어 통치하는 '4분할 통치 체제'를 도입해 제국의 통치 효율성을 높이려 했다. 또한, 전제 군주제를 확립해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고, 화폐 개혁을 통해 경제를 안정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도 로마의 몰락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그의 뒤를 이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재위: 306년~337년)는 보다 근본적인 변화를 시도했다. 콘스탄티누스는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크리스트교를 공인하고, 종교적 관용을 허용함으로써 크리스트교의 확산에 큰 전환점을 마련했다. 그는 또한 330년,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동방의 비잔티움으로 옮기고, 이를 '콘스탄티노플'이라 명명하며 동로마 제국의 중심지로 삼았다. 이로써 로마 제국은 동서로 분리되어 통치되기 시작했다.

 

크리스트교의 확산과 제국의 변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치세 동안 크리스트교는 로마 제국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특히, 325년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크리스트교의 교리와 신학이 체계적으로 정립되었고, 삼위일체설을 기초로 한 정통 교리가 확립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크리스트교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며 교회의 권력을 강화했고, 크리스트교는 제국 내에서 중요한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4세기 말, 테오도시우스 황제(재위: 379년~395년)는 크리스트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선포하며 다신교를 공식적으로 폐지했다. 이로써 크리스트교는 로마 제국의 공식 종교로 자리 잡았고, 로마의 사회와 문화는 크리스트교적 가치관에 따라 재편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교회는 점차 정치적 권력을 갖게 되었고, 로마 제국 내에서 교회와 국가가 밀접하게 연관되는 체제가 마련되었다.

 

게르만족의 침입과 서로마 제국의 멸망


콘스탄티누스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로마 제국은 더 이상 쇠퇴의 흐름을 되돌릴 수 없었다. 4세기 후반, 유럽을 침략한 중앙아시아의 유목 민족 훈족이 게르만족을 압박하면서, 서고트족, 반달족 등 여러 게르만족이 로마 제국의 영토로 대거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로마 제국의 군대에서 용병으로 복무하거나, 일부 지역에서는 로마의 보호를 받으며 정착했지만, 점차 제국 내에서 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했다.

특히, 서고트족은 410년 로마 시를 약탈하며 로마 제국의 몰락을 상징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이후 여러 게르만족들이 이탈리아 반도와 로마 영토 곳곳에 침입해 각자의 국가를 세우며, 로마 제국의 통제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결국 서기 476년, 게르만족 출신의 용병 대장 오도아케르가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를 폐위시키며 서로마 제국은 공식적으로 멸망하게 되었다.

 

동로마 제국의 생존과 크리스트교의 확립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동로마 제국, 즉 비잔티움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약 1천 년간 생존했다. 동로마 제국은 크리스트교의 중심지로 발전하며,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중요한 문화적, 종교적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로마 제국의 법률과 문화는 동로마 제국에서 보존되었으며, 크리스트교는 이후 유럽의 사회와 정치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로마 제국의 쇠퇴와 크리스트교의 확산은 서양 역사에 큰 전환점을 가져왔다. 로마가 무너지고, 그 빈자리를 크리스트교가 메우면서, 유럽의 중세 시대가 시작되었다. 로마의 유산은 크리스트교를 통해 보존되고 확산되었으며, 이는 이후 유럽 문명의 뿌리가 되었다.

 

◆서기 5세기~9세기: 프랑크 왕국과 유럽 봉건제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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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프랑크 왕국이 서유럽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특히, 카롤루스 대제는 기독교 보급과 정복 활동으로 프랑크 왕국을 확장하고, 중세 서유럽 문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의 사후 프랑크 왕국은 분열되었고, 이 시기에 노르만족이 유럽 곳곳에 국가를 세우며 봉건제가 확산되었다.이러한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유럽은 고대 문명부터 봉건제 사회를 거쳐 근대와 현대 사회로 발전해 왔다. 

 서기 5세기, 서로마 제국의 멸망과 함께 유럽은 새로운 정치 질서를 모색하는 혼란의 시기에 접어들었다. 게르만족들이 로마 제국의 영토에 침입해 여러 왕국을 세우기 시작했으며, 이 가운데 프랑크족이 가장 강력한 세력을 구축해 유럽의 정치 지형을 바꾸어놓았다. 프랑크 왕국은 메로빙거 왕조와 카롤링거 왕조를 거치며 서유럽의 중심 세력으로 자리 잡았고, 봉건제는 이 시기 유럽의 사회 구조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클로비스의 개종과 프랑크 왕국의 부상


프랑크족은 라인강 유역을 기반으로 하여 서기 5세기에 갈리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로마 제국의 잔존 세력을 밀어냈다. 프랑크 왕국의 창립자로 알려진 클로비스는 메로빙거 왕조를 세우고 서기 496년, 로마 가톨릭교로 개종했다. 이는 중요한 사건으로, 로마 제국의 기독교 전통을 받아들이면서 프랑크 왕국은 서유럽에서 기독교 세력과의 협력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클로비스의 개종은 프랑크 왕국이 유럽 내에서 다른 게르만족 왕국들과 차별화되는 계기가 되었고, 로마 가톨릭교의 보호 아래 프랑크 왕국은 더욱 강력한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카롤링거 왕조와 카롤루스 대제의 중세 유럽 통일


클로비스의 후계자들은 왕권을 약화시키며 혼란의 시기를 겪었지만, 8세기에 프랑크 왕국은 카롤링거 가문을 중심으로 다시 부상하게 된다. 특히, 카롤루스 마르텔은 732년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며 유럽 내에서 그리스도교의 수호자로 명성을 얻었다. 카롤루스 마르텔의 후계자인 피핀은 메로빙거 왕조의 허수아비 왕을 축출하고, 로마 교황의 지지를 받아 751년에 카롤링거 왕조를 세우며 자신이 왕위에 올랐다.

 

카롤링거 왕조의 가장 중요한 인물은 바로 피핀의 아들 **카롤루스 대제(샤를마뉴)**다. 카롤루스 대제는 프랑크 왕국의 전성기를 이끌며 중세 유럽의 정치적, 문화적 통합을 이루어냈다. 그는 현재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에 해당하는 지역을 통합하고,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다. 특히, 카롤루스 대제는 서기 800년 크리스마스 날, 교황 레오 3세로부터 로마 황제로 즉위하며 로마 제국의 부활을 상징하는 중대한 사건을 만들어냈다. 이로써 서유럽은 카롤루스 대제의 지배 아래 기독교적 제국으로 재편되었으며, 이는 후대 유럽 국가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카롤루스 대제는 문화와 교육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궁정에 학자들을 불러모아 라틴어 문학과 고전 연구를 부흥시키는 '카롤루스 르네상스'를 일으켰다. 이 시기에 로마와 그리스의 고전 문화가 보존되고 발전하여 중세 유럽의 학문적 기초를 마련했다. 또한, 교회를 통한 기독교 교육을 장려하며 유럽 내 기독교적 가치와 법률 체계가 확산되었다.

 

베르됭 조약과 프랑크 왕국의 분열


그러나 카롤루스 대제가 사망한 후, 그의 후계자들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권력을 유지하지 못했다. 카롤루스 대제의 손자인 루트비히 경건왕이 사망한 후, 그의 세 아들들은 권력 다툼을 벌였고, 결국 서기 843년 베르됭 조약을 통해 프랑크 왕국은 세 부분으로 나뉘게 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프랑크 왕국은 서프랑크(오늘날의 프랑스), 동프랑크(오늘날의 독일), 중프랑크(이탈리아 북부와 로마)의 세 왕국으로 분리되었고, 이는 유럽의 정치적 분열을 가속화했다.

 

봉건제의 확산과 유럽의 새로운 질서


프랑크 왕국의 분열 이후, 유럽은 외부의 침입과 내부적 혼란을 겪게 된다. 9세기 무렵, 노르만족이 유럽 전역을 침략하며 기습을 감행했고, 마자르족과 이슬람 세력 역시 유럽 내로 진입해 혼란을 가중시켰다. 이러한 외부의 위협과 왕권의 약화로 인해 중앙 정부는 각 지역을 통제할 능력을 상실했다.

그 결과, 지방 세력가들이 자신들의 영지를 방어하기 위해 스스로 성을 쌓고, 무력을 갖추며 봉건제가 확산되었다. 봉건제는 주군과 봉신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정치적 체제로, 각 지방 영주들은 자신이 다스리는 영지에서 자치권을 행사하고, 농민들은 영주의 보호 아래 농사를 지으며 생활했다. 주군은 봉신에게 영지를 제공하고, 봉신은 주군에게 군사적 지원과 충성을 바치는 상호 계약 관계가 봉건제의 근본이었다.

 

이 시기에 유럽 사회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분권화되었으며, 농업 중심의 장원제가 확립되었다. 성직자들 역시 영지를 소유하며 봉건 사회의 중요한 구성원으로 활동했다. 이러한 봉건적 구조는 이후 중세 유럽의 사회 질서를 형성하는 기반이 되었으며, 장기적으로는 유럽의 각 지역에서 다양한 국가들이 형성되는 토대가 되었다.

 

 중세 유럽의 새로운 질서

 

서기 5세기에서 9세기까지, 프랑크 왕국의 성립과 발전은 유럽 중세의 중요한 시작을 알렸다. 클로비스의 개종, 카롤루스 대제의 제국 건설, 그리고 베르됭 조약을 통한 프랑크 왕국의 분열은 유럽의 정치적, 종교적, 문화적 기틀을 마련했다. 또한, 봉건제의 확산은 중세 유럽의 사회 구조를 형성하며 새로운 정치 질서를 만들어냈다. 이 시기는 중세 유럽의 형성기였으며, 이후 유럽 역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전환점으로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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