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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보다는 차이를 인정하는 사회로!

편집부 | 기사입력 2013/09/18 [23:56]

차별보다는 차이를 인정하는 사회로!

편집부 | 입력 : 2013/09/18 [23:56]

▲ 김정겸 (한국외국어 대학교 철학과 교수)

[내외신문=아시아타임즈發] ‘앞으로 나란히’는 차별이다. ‘옆으로 나란히’는 더불어(with)있음으로 평등한 가치를 지닌 존재를 상징한다. ‘옆으로 나란히’에는 차이를 인정하지만 차별이 없는 사회이다.

 

차이성(It is different)을 강조하는 다원주의 사회(Post-Modernism)에로 나가야 한다. 현재 우리는 다원주의 사회에 들어와 있다. UNESCO에서도 단일 민족주의를 포기하고 다원주의를 지향할 것을 권고 하고 있다. 차별은 증오와 갈등을 낳게 하는 원인이 된다. 다원주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사고를 갖어야 할 것이다.

 

?‘너’도 ‘나’이니 ‘너’와 ‘내’가 다름이 아니노라

“네가 내가되고 내가 너가 되는 사회”는 다양성이 인정되고 다양한 사고를 받아들이는 창의적 세상이다. ‘나’만이 옳고 ‘너’는 다르다는 차별에서는 전제주의적 사회이며 획일적 사고만을 지향하게 된다. 그런 사회는 Foucault의 말처럼 ‘원형감옥(panopticom)'의 세계이다.

 

그런 사회는 우리를 맹종하게 하는 규율이나 규칙으로 지배하고 통치하려고 한다[그러니 일전의 컬럼처럼 노자의 희언자연(希言自然)을 지향해야할 것 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너‘와 ’나‘의 참된 만남이 이루어 질 수 없다. M.Buber식으로 말하자면

 

『너와 나』의 만남의 세계가 아니라 『나와 그것』의 세계가 된다. 『나와 너』의 만남은 ’나‘도 사람, ’너‘도 사람으로서 존중한다는 것이다. 참 인격적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진정한 대화의 장이 이루어져 참된 교섭이 이루어 질 수 있다.

 

그러나 『나와 그것』의 만남은 ’나‘만 사람이고 상대방을 비인격적 존재인 ’그것(영어 : It, 독일어 : Es)'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만남은 자기(나)를 중심적이며, 상대방(그것)을 이용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진정한 대화가 이루어 질 수 없다. 노동자와 사용자, 여당과 야당,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나와 너』의 인격적 관계가 이루어 졌을 때 Rawls의 ‘반성적 균형(중용 : 中庸)’이 이루어 진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이다. 공자는 ‘기소불욕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이라 하여 서(恕)를 강조하였다. 恕라는 단어를 볼 때 마음(心)이 같다(如)라는 것으로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면 남에게도 베풀지 말라”는 것이다.

 

즉 내가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데 남의 마음은 더하지 않을까  그러니 내 마음이 네 마음인 것이다(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 여기에는 같음과 배려와 돌봄(caring)이 있는 것이다. 차이(different)를 인정하는 것은 갚음과 배려와 돌봄이다. 이럴 때 ‘나란히(with)’가 될 것이고 ‘너=나’라는 등식이 성립되어 갈등이 없게 될 것이다. 원효의 말을 빌자면 和諍(화쟁)이 될 것이고 Miller의 말을 빌자면 Holistic의 세상이 될 것이다.

 

다원주의 사회에서 내(內), 외(外)가 없다.


다원주의 사회를 대표하는 말로 ‘Stew 이론’이 있다. 스튜(stew)는 ‘건더기와 국물이 함께 녹아들어 있는 것’정도가 될 것이다. 즉 건더기는 건더기 나름의 특성을 지니며 국물 속에는 모든 건더기의 속성이 함께 녹아 들어있는 것이다. salad bowl보다는 진일보한 생각인 것 같다.

 

salad bowl은 건더기가 그릇 속에 들어가 있지만 융합된 것이 아니라 따로따로 돌아다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그릇(bowl)에 많은 다인종(salad)이 있지만 그네들이 아직은 우리문화에 동화하지 못한 주변인, 경계인으로 남아있다.


?그네들에게서 비행이 저질러 진다면 이런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Stew이론에 따르면 각 인종의 문화(건더기)를 인정하면서 그네들이 대한민국의 일원(국물)으로서 인정이 되어야 화합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럴 때 ‘with'의 사유가 나오게 된다. 그네들과 진정한 대화(communicate with)가 이루어지며 이해가 될 것이다.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갈등을 해소한다는 것이고 범죄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내가 너를 인정할 때 너도 나를 인정한다. 내가 너를 이해할 때 너도 나를 이해한다. 일방적인 관계가 아닌 평화로운 쌍방의 관계를 지향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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