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시즌2] 차바아 제 122회 박명수 교수(서울신대 교수) ...6.25 전쟁: 대한민국의 시련, 자유세계로의 편입

박명수 교수 | 기사입력 2023/05/21 [16:15]

[시즌2] 차바아 제 122회 박명수 교수(서울신대 교수) ...6.25 전쟁: 대한민국의 시련, 자유세계로의 편입

박명수 교수 | 입력 : 2023/05/21 [16:15]

 

 

1945815일 한반도에는 해방과 더불어 38선이 그어졌다. 하지만 이 38선은 단지 일본군 무장채제를 위한 군사작전선이었지 국경이 아니었다. 소련은 이 38선을 강화해서 먼저 한반도 북부에 공산국가를 만들고, 남한까지 공산주의로 통일하려고 했다. 하지만 미국은 먼저 일본군 무장해제를 한 다음에 38선을 철폐하고 중앙정부를 만들자고 했다. 이런 미국과 소련의 입장은 좁혀지지 않았고, 소련은 자신의 입장을 포기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미국도 먼저 남한에 단독정부를 만들고, 다음에 통일정부를 만들고자 하였다. 그래서 해방되었을 때에 북한과 남한은 다같이 자신의 체재로 통일하기를 원했다. 이것을 김일성은 국토완정론이라고 했고, 이승만은 북진통일론이라고 했다.

 

미국은 원래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과 협력하여 세계를 이끌어 가려고 했다. 하지만 소련은 전쟁이 끝나자 마자 세계를 공산화하려고 했다. 이것을 안 미국의 트루만은 소위 트루먼독트린을 발표하여 대소 봉쇄정책을 폈다. 이런 미국의 변화는 전후 미국 기독교의 변화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미국 기독교는 세계가 공산화하는 것을 보면서 공산주의를 막고, 민주주의와 기독교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여기에 가장 앞장선 것이 복음주의 선교단체인 미국의 십대선교회(YFC)이며, 그 중심인물이 밥 피얼스와 빌리 그래함이었다. 트루만의 반공주의와 복음주의의 반공주의는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밥 피얼스는 전쟁 기간에 많은 고아를 도왔으며, 빌리 그래함은 반공포로석방에 많은 기여를 했다.

 

1948625일 북한은 남한을 침공하였다. 6.25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미국과 국제사회가 빨리 한국전쟁에 참여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살펴 보아야 할 것은 해방 후 국제정치와 유엔의 관계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 연합국은 패전국은 연합국이 직접 통치하고, 패전국의 식민지였던 나라, 곧 추축국의 패배로 해방된 국가는 유엔이 담당한다고 되어 있다. 한국은 후자에 속하는 것이며, 따라서 한국문제는 유엔이 책임져야 한다. 미국의 애치슨선언은 이런 국제적인 약속에 따랐을 뿐이다. 이 원칙에 의해서 한국문제는 유엔이 다루게 되었고, 북한이 남침했을 때 이것을 다루어야 할 곳은 유엔안보리였다. 미국은 바로 유엔의 결의를 근거로 즉각적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사람이 당시 특사로 한국을 방문했던 덜레스이다. 덜레스는 원래 장로교 장로로서 유엔을 창설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1948년 한국이 유엔에서 승인을 받을 때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6.25 전쟁 직전 한국을 방문하여 영락교회의 기도회에 참여하였고, 전쟁 발발 즉시 유엔에 이 문제를 회부할 것을 요청하였다. 덜레스는 맥아더 만큼 한반도를 위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6.25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유엔군의 조기 참전이라면 그 다음 중요한 것인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다. 인천상륙작전은 순식간에 전세를 뒤바꿔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런 인천상륙작전의 배후에는 기독교가 있었다. 트루만은 195091일 이번 전쟁의 목적은 자유, 특히 종교의 자유에 있다고 했다. 이승만은 부산에서 맥아더와 함께 기도했고, 최전선 첩보대원은 기독교인들로 구성되었다. 928일 서울이 수복되었을 때 맥아더는 서울시청에서 주기도문을 낭독하였다. 이것은 1948년 국회 개원 기도만큼이나 중요하다.

 

6.25 한국전쟁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한미동맹의 체결이다. 한반도는 오래 동안 극동아시아의 분쟁지역이었다. 이런 한반도가 주변국가들의 침략에서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미국과의 동맹이다. 이승만은 이런 동맹을 맺기 위해서 필사적인 노력을 하였고, 그 결과 195310월 한미동맹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것으로 대한민국은 명실상부 자유세계에 편입되게 되었고, 그 결과 자유무역과 종교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바로 이런 한미동맹의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다. 1948년에 대한민국이 만들어졌다면 1953년에 대한민국을 지키는 만리장성이 건설된 것이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이런 울타리 안에서 발전해 온 것이다. 6.25는 한민족에게 큰 시련이었지만 한미동맹을 한민족에게 큰 선물이었다.

 

 

 

이 기사 좋아요
  • 도배방지 이미지

차바아, 대한민국의시련 관련기사목록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