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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걷기 대회 열려:내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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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걷기 대회 열려

- 광화문복합상소 사적을 걷다

강민숙 | 기사입력 2024/04/22 [16:12]

서울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걷기 대회 열려

- 광화문복합상소 사적을 걷다

강민숙 | 입력 : 2024/04/22 [16:12]

 

[서울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걷기 대회 열려]

 "광화문복합상소 사적을 걷다"

 

 <18932월 광화문복합상소 기념제>202442011시 서울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주최로 마련됐다. 행사는 광화문의 역사적 유래와 상소 내역에 대한 설명에 이어 광화문복합상소와 함께 진행된 정동 괴서사건의 현장을 답사하는 행사로 진행됐다.

행사 시작 인사말에서 채길순(서울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1893년 광화문복합상소는 오늘날 광화문광장이 민중의 목소리의 표출하는 시작점이라면서 광화문광장이 민의를 표출하는 전통적이고 상징적인 장소가 된 행사라고 사건의 의미를 부여했다.

해설에 나선 박길수(서울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총장)는 현재 광화문 광장의 의미와 육조거리가 지닌 장소성 설명에 나섰다. 당시 육조거리였던 광화문 광장은 의정부와 이, , , , , 공조 등 육조(六曹)의 주요 관아가 위치했으며, 조선왕조의 정치 1번지였다고 했다. 임진왜란 때 피해를 입은 육조거리는 19세기 말 흥선대원군 때 재건하여 해태(해치, 시비와 선악을 판단한다는 상상의 동물 해태가 있어서 붙은 이름) 상을 중심으로 개화기 외국인들은 내각의 길, Cabinet Street)’로 불렀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시대 이름인 육조라는 말을 없애기 위해 광화문통이라고 이름을 변경했고, 해방 후 미군정기에는 군정청이 입주 후 군정청 광장으로 불렸다. 대한민국이 들어서면서 세종로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20097월 광화문광장으로 불렸다.

광화문 앞은 조선시대 최고 지성이자 개혁파의 거두였던 조광조를 비롯한 1천여 명의 성균관 유생들이 엎드려 상소를 하던 곳이었으며, 조선후기 최익현이 죽기를 각오하고 흥선대원군의 하야를 요구하며 지부상소(持斧上疏, 상소의 내용이 왕의 비위를 거슬려 도끼로 목을 베이는 형을 각오한다는 뜻)’를 올렸던 곳이다. 언로(言路)에 있어서 이미 선진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조선 정치문화의 핵심이 바로 상소제도였던 것이다. 그 상소의 소통 장소가 바로 광화문 앞이었다.

그 이후 민주화 시위 때나 촛불집회를 비롯한 각종 행사들이 열리면서, 여전히 전통적으로 국가 권력과 민중 권력이 맞부딪치거나, 만나는 장소가 되었다. 이에 따라 광화문 네거리 일대를 동학농민혁명 시기에 최초로 관군을 물리쳤던 황토현전투를 상징하는 황토마루(황토현)’가 존재한다.

광화문복합상소의 전개 과정과 영향 설명에 나선 해설자는 ”1890 대에 들어서면서 적극적인 동학창도주 수운 최제우의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했고, 189210월 공주 교조신원운동, 189211월 삼례 교조신원운동을 진행하면서 18932월 광화문앞 교조신원운동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 광화문복합상소는 보은취회로 이어진다.

당시 광화문 복합상소의 소두는 손천민으로, 상소문의 핵심 내용은 동학이 사교가 아니라는 소명과 함께 수운 선생의 신원을 해달라는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상소 팀은 소수(疎首) 박광호 외 40명과 지원 팀30여 명으로 구성되었다. 189328일에 상경해 11일 경복궁 광화문 앞에 엎드려 상소를 시작했다. 그 광경은 붉은 보자기에 싼 상소문을 앞에 두고,/ 두루마기(周衣)를 입은 9명의 동학도인들이 염주를 들고 주문을 외고,/ 그 뒤로 선비 차림의 동학도인 30여 명이 엎드려 역시 주문을 외며 / 상소문을 접수해 줄 것을 간구했다. 이런 상소문을 시작한 지 사흘째인 13일에 사알(司謁; 궁궐에서 왕명을 전하던 정6품 잡직 관원)이 와서 격식을 갖추어야만 상소를 받아들일 수 있다라고 하며 상소문 접수를 거절하였다. 다만 상소의 내용을 물어다가 왕에게 전달했는데 집으로 돌아가 안업(安業)하면 소원을 들어주리라고 했다. 정부는 장차 사태가 어떻게 돌아갈 지 생각해 보지도 않고 해산시키는 데만 급급했다. 역시 고종의 비답은 곧 공약(空約)이 되었고, 오히려 정부는 상소를 올린 주모자를 색출하여 체포를 시도했고, 지방관들의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그러나 서울에 출현한 동학은 정부를 화들짝 놀래게 했으며, 당시 조선을 둘러싸고 각축을 벌이던 세계 각국의 이목을 집중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1892년 이후 전개된 교조신원운동을 통해 동학교도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기득권층에게 하소연하는 방법으로는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근본적인 사태 해결은 전국적인 봉기를 통한 민 씨 정권의 타도와 외국 세력의 축출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동학지도부는 복합상소를 중지하고 곧장 해산하여 도소가 있는 충청도로 내려갔다. 18933, 2만여 명의 교도가 모인 가운데 충정도 보은 취회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정치적 기치를 내건 보은취회가 열려 동학농민혁명의 길을 향한 행사가 진행됐다.

 

                                        채길순 서울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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