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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이 영원이라는 것]

강민숙 | 기사입력 2023/09/13 [23:02]

[순간이 영원이라는 것]

강민숙 | 입력 : 2023/09/13 [23:02]

 

[순간이 영원이라는 것]



 박원희 시인이 한솔에서< 아내>시집을 출간했다.

<그리이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지문 "나는 순간, 순간이 영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읽은 적이 있다. 아내의 투병기는 아내의 일생에서 보면 잠깐의 일이다. 그러나 그 때의 연명이 없으면 지금은 없다. 나는 그 때 어리둥절 그냥 지나간 것 같다. 그 때 그랬다. 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은 지난 시간을 두고,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하는 말이다.

 

나의 아내는 병실에서,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 아내의 보호자로서 삶을 살았다. 아내가 병원에 입원하자 바로 닥친 현실, 산부인과 의사는 [융모상피암]이라고 말했고, 하루도 지나지 않아 폐로전이 되어 각혈을 시작하여 호흡기과로 넘어가 담당의사가 호스피스로 가자라고 하는 말을 복도에서 건네고, 내가 어떤 이야기도 할 겨를이 없이 사라졌다. 그 다음에는 암 전문의가 중환자 대기실 와서 하는 말은 암의 진행이 빨라서 대책을 세울 수 없다는 말로 한 참 동안 나를 설득 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미 나의 아내는 그 때 죽었는지도 모른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나의 사업도 어려워지고 있었고, 나 자신의 일에도 정신이 없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내의 병은 빠르게 왔다.

그리고 나는 그 밤 아내와 내가 살던 곳을 밤새도록 돌았다. 나의 소년시절, 젊음과 아내의 기억이 있던 곳. 아버지가 사기를 당해 집에서 맨몸으로 나가살던 시절 이사 갈 곳이 없어 얼음이 언 방을 얻어 아이들과 살던 집, 고물상 옆 허름한 방 2개의 집, 다섯이 끼어 살던 방 두개 13평 서민 아파트, 그리고 이사 간 24평짜리 집, 그리고 아내가 가게를 하던 생각들이 스쳐지나가고, 아내와 아이들과 행복했던 시간은 없었던 것 같았다. 나는 차에서 눈물을 흘리며 최근 선택한 사업이 아내를 힘들게 하였고 아내가 그로 인해 심한 병이 침범 하지 않았나 생각을 하면서, 나는 나를 후회하고 있었다. 그리고 호스피스로 가나 치료로 가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생각에 이르러서야 나는 나를 세웠다.

다시 나는 새벽 중환자실 내 자리에 있었고, 산부인과 주치의가 새벽에 회진을 하고 있었다. 나는 "선생님" 하고 부르면서 물었다. "치료는 할 수없는 건가요." 하고, "산부인과에서 호흡기과로 넘어가서" 라는 말끝을 붙잡고 "그래도 선생님 할 수 있다면 치료를 해주세요.", "회진이 끝나고 약이 있나보고 다시 오겠습니다." 의사는 바쁜 걸음으로 나가고 다시 왔다. "내일 오전 까지 약이 되니까 치료 해봅시다."

다음 날 새벽 의사는 나에게 주의사항 등을 이야기하고, 나는 의사에게 내 아내의 생명 여탈 권을 넘겨주었다. 나는 몸도 마음도 떨렸다.

의사는 "제가 할 수 없는데, 암 전문의, 호흡기 전문의 들이 모두 반대하는데 제가 책임지기로 하고 하는 겁니다. 믿고 한 번 가봅시다." 하고 말 했다. 아내의 치료는 시작 되었다.

여기까지가 치료의 시작이고 아내의 투병과 나의 병원 생활의 시작이고, 골재 생산을 해서 인근 레미콘회사에 파는 것이 주업인 나는 하청으로 골재를 생산해 주기로 하고 들어간 사업장이 원청의 내부 문제로 분란을 겪으면서 생산은 중단 된 상태에 있었고, 아내는 그 이유로 아내도 나와 같이 금전적으로 많은 고통을 받고 있었다. 이런 상태의 고흥사업장과 청주 후에는 서울과 고흥을 오고가는 시간을 반복하며, 다른 사람이 죽어 가는 현실을 목도하고, 삶이란 어느 소녀의 말처럼 "선생님 들어보셔요, 우리 엄마 아직 숨을 쉬고 있잖아요!" 하는 말을 지켜보는 가족으로서의 나와 대비되고 그렇게 죽는 사람이 많은 병원에서 있었고, 그에 답하는 의사는 진정 하세요.” 라고 했나 기억이 나지 않는 말 아내와 나란히 누워 며칠을 투병하고 있던 아주머니는 돌아가셨다. 그 이후로 그 아주머니의 머리까지 덮어 침대를 잡고 따라 한밤중의 울음소리를 감추며 나가고, 나도 슬펐던 몇 번은 더 반복한 병실에서 있었다. 나의 아이들도 그만한 또래의 소녀였던 때였다.

아내는 그 후로 세 번은 더 죽을 것 같다는 소리를 의사는 나에게 하였고, 머리는 다 빠지고 몰골은 새까맣게 암병동과 중환자실을 반복하는 중 폐렴 합병증이 왔다. 후두절개를 하고 아내는 산소호흡으로 나는 병원 로비에서, 병원 로비에 기거 할 수 없는 시간은 차 안에서 겨울나기를 하고, 봄 사월 아내의 폐는 85%가 석회화 되고, 15%의 만 남았다는 진단을 받았다. 산소발생기를 달고 서울아산병원에서 3개월 반 만에 청주성모병원으로왔다. 아내의 암은 치료가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아산병원의 부인과 암병동에서 내과의 호흡기과로 병실이 옮겨졌고, 처음 입원한 청주성모병원의 호흡기담당 의사를 찾아가 상담을 하고, 처음 호스피스를 말한 주치의에게서 한 달을 치료 받고 퇴원하였다. 5개월 반의 병원생활 이었다.

그 후로도 나의 석산은 더 어려워졌고 기사회생을 바랬으나 결국 없어지고 가난과 고통의 세월은 지속 되었다. 사업이 되지 않으니 돈 때문에 아픈 사람이 많아졌다. 어떻든 돈을 투자하고 나에게 받지 못한 여러 사람들이 돈으로 아프고 고통 속에 있게 되었다. 나는 그 후로 일어서려는 시도를 하였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이용되는 처지로 전락해 버리고, 어렵게 자책할 뿐 다른 방법이 없었다.

10년 지나가고 있다. 시작 하면 아내는 아프니까 아팠던 때. 아내는 호흡기를 하지 않고 살아보겠다고, 산소발생기를 반납하고, 지금까지 10년을 넘게 살고 있다. 그 사이 아내를 아껴주던 당숙도 죽고 어머니 아버지 고모부 어른들이 영원히 살 것 같더니 돌아가시고 장모도 영면의 길에 접어들어 아내나 나나 천애고아가 되어 살고 있다.

 

봄이라고 산에는 꽃이 피고 아내가 빙개산을 올랐다. 나는 뒤를 따랐다. 그렇게 계룡산이 바로보이는 정상까지 보통 사람들 보다 오르는데 두 배의 시간은 걸린 것 같다. 아내는 오르고 또 오르고 올라 정상에 섰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오늘에 이르렀다. 나는 아내가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아내를 보면 끊임없이 자신의 몸을 돌보는 과정에 무엇보다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았다.

 

박원희 시인의 시집을 받아서 읽은 김형로 시인은 시 아내를 읽고 이렇게 리뷰를 남겼다.

 

참 오랜만에 아름다운 시집을 받았습니다. 벌써 10년 전에 시한부 여명을 선고받고 투병한 아내에 대한 속살 깊은 정과 살아온 날들에 대한 후회, 그리고 애틋한 사랑을 담고 있습니다. 시인의 극진한 사랑으로 아내는 살아서 귀환했고 지금은 기능이 팔 할은 사라진 폐로 호흡을 하며 시인의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시인은 주치의로부터 아내를 호스피스로 옮길 것을 요청받았고, 의사는 2-3주 정도 밖에는... 말까지 들어야 했습니다. 이제 겨우 그의 나이 쉰. 사형선고와 다름없는 말에 시인은 밤새 울며 좌절했지만, 다음날 새벽 다시 마음을 오롯이 세워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생사여탈권을 드릴 테니 끝까지 치료해주십시오.”

아내를 떠나보낼지도 모를 큰 고비를 겪으면서 중환자실과 암병동을 오고 가며, 아내를 만나고 기다리며 쓴 순애보가 이번 시집입니다.

 

아내가 아프기 시작한 그때 당시 시인은 사업이 잇달아 기울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웠다고 합니다. 남자들이 흔히 그렇듯 밖으로 돌면서 아내의 마음은 잘 챙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시인은 아내의 투병을 계기로 아내와 어려웠던 생활을 헤쳐 나왔던 여러 곳을 돌아다녔습니다. 북받혀오는 설움과 후회를 가슴에 다시 욱여넣으면서 말입니다.

다섯 식구가 기거를 했던 고물상 옆 단칸방과 13평 서민 아파트 등등. 고생했던 아내를 차마 보낼 수 없어 시인은 모든 것을 털어서라도 대한민국 최고의 병원에서 치료를 해보겠다고 다짐을 했고 결국은 아내를 살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쇠처럼, 가난과 시련이 단단한 글을 만드는 것 같습니다. 안과 밖이 똑같은 사람이 박원희 시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식이나 거짓 없이 웃는 그의 순박한 웃음을 여러 번 본 적 있습니다. 그런 그가 내뱉은 시의 진술은 그만큼 더 크게 저를 울렸습니다. 시집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으면 합니다.

 

박원희 시인은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1995년 『한민족문학』으로 등단하였다. 시집 『나를 떠나면 그대가 보인다』, 『아버지의 귀』, 『몸짓』 방아쇠증후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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