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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리, 태극기 휘날리며를 돌아보며:내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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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리, 태극기 휘날리며를 돌아보며

노춘호 | 기사입력 2012/04/29 [11:39]

쉬리, 태극기 휘날리며를 돌아보며

노춘호 | 입력 : 2012/04/29 [11:39]

쉬리, 태극기 휘날리며를 돌아보며

국민들이 예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문화와 예술계의 파급 효과는 정치나 경제 부분의 힘보다 더 강하다. 한국의 최대 기업이라는 삼성도 유럽이나 미국사람들은 일본 기업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더 많다고 하지 않던가.

더불어 한국의 정치인들을 -대통령을 위시해 장관, 국회의원 등- 외국 사람들은 한국의 정치인인지도 모르고 관심을 가질 하등의 이유가 없다.

반면에 문화의 힘은 위대하다는 것을 입증 해주듯 한류문화에 외국인들은 열광하며, 한국 아이돌 그룹에 대한 관심이 한국의 문화, 언어 그리고 음식까지 다양하게 발전해 가고 있는 것만 봐도 문화와 예술의 힘은 무한하고 파괴력 또한 강하다.

이런 무한한 힘을 가진 문화예술이 사상을 품고 작품으로 만들어졌다면 과연 어떠한 일이 발생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기 위해 한국에서 많은 관객을 동원해 국민들의 감성을 자극한 두 편의 영화에 대해서 얘기를 하려고 한다.

1999년 당시 개봉해 화제를 몰고 온 쉬리라는 영화는 한석규, 최민식 등이 열연해서 호평을 받고 대종상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한 영화다.

쉬리는 남북이 대치한 상태에서 북은 전쟁준비로 모든 경제력을 소비하여 북한주민들이 헐벗고 굶어 죽는-북한은 당시에 주민들이 독풀을 먹고 죽는 사태가 발생됨- 상황이 발생한 사건을 기초로 만든 영화다.

주 내용은 북한주민들이 어려운 생활로 죽음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을 때 한국은 자본주의의 수혜로 풍족한 생활을 누리는 것을 대비해 북한주민들이 기아로 고통을 받을 때 한국국민은 그에 대한 죄책감이나 일말의 동정심도 없이 자본주의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백화점 등에서 화려하고 풍족한 소비를 하는 냉혹한 인물로 표현 됐다고 보면 별 무리 없을 거 같다.

특히 필자가 이 쉬리라는 영화 속 장면 중에서 제일 관심을 가졌던 장면은 북에서 남파된 최민식이 한국에서 주최한 남북한 축구경기장에 화학무기를 터트리려 한국의 정부 요원들과 대치 상황에서 고함을 지르는 장면으로 자세히 기억하지는 못하겠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던 거 같다. “남조선 반동들이 호위호식해서 배때기에 기름이 낄 때 북한 인민들은 굶어 죽고 있다” 는 내용으로 기억한다.

영화 속 장면이지만 필자는 1999년 당시에 왜 북한 군인이 한국에 들어와 수만 명을 죽이고 자폭을 할 정도로 원한을 가지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장면이었다.

쉽게 얘기하자면 북한주민들의 기아의 고통에 대해 한국이 비난 받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고 북한도 그들 나름의 여유로운 생활을 누리려면 전쟁준비에 모든 경제력을 쏟아 붓는 것을 포기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이 태동된 시기부터 현재까지 전쟁을 하기 위해 준비를 해 온 것은 익히 알고 있지만 그들이 과연 무엇을, 누구를 위하여 전쟁준비를 하고 있는 건지, 어느 국가와 전쟁을 하려고 평생을 전쟁준비에 매달려 있는 것인지에 대한 내용은 영화에서 언급된 것이 없어 좀 의아하기는 했다.

북한 그들도 전쟁포기와 기간산업에 대해 투자를 늘리면 충분히 잘 살 수 있을 것을 쓸데없는 전쟁준비로 애긋은 주민들만 고통을 받게 하고 또한 이를 한국의 잘못이라고 생각한 북한의 테러범은 한국에 와서 테러를 자행하려 한 것 등 이치에 맞지 않는 부분이 상당한 거 같았다.

물론 세월이 세월인 만큼 당시 좌편향 김대중 정권이 집권하던 시기이기에 북한을 옹호하는 영화를 상영한다고 해도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정도 국가 분위기가 좋은 것이 아니었기에 단지 하나의 영화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북한의 어려운 상황에 김대중 정권은 북한을 무조건 도와주어야 하는 입장에서 당위성을 찾아야 하는데 이 영화가 아주 큰 공헌을 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가 그들의 어려움에 대한 원인은 밝히지 않고 단지 불쌍하다는 것만 부각시켜 국민들의 동정심을 자극해 국민의 눈을 흐리게 만들어 놓은 틈을 이용 김대중 정권이 북한에 엄청난 현금과 식량을 지원하지 않았나 싶다.

한편 김대중 정권과 같은 좌편향 노무현 정권의 집권 시기 2004년에는 불멸의 대작 “태극기 휘날리며” 라는 작품이 제작되었는데 역사적 고증을 통해서 남·북 어디에도 치우침 없이 중간적 입장에서 제작했다고 해서 개봉 전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영화였다. 관객 수도 1000만을 넘어서는 엄청난 인기를 누리며 각종 영화제에서도 거의 모든 상을 휩쓸다 시피 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남북이 38선으로 완전하게 대치하기 전 시대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감독이 예고했던 것처럼 철저한 고증을 한 것은 어느 정도 인정 되지만, 전쟁영화라면 가장 중요한 화두인 누가 왜 전쟁을 일으켰는지는 기본적으로 내용에 들어 있어야 하는데 영화에서는 그것에 대한 내용은 없었던 걸로 안다.

한국전쟁을 기초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전쟁은 일어났지만 누가 왜 일으켰는지에 대해서는 별 언급이 없고 단지 형제의 끈끈한 형제애와 가족 간의 사랑 등과 전쟁 장면만 부각시켜 아마 외국인이 이 영화를 관람했다면 한국과 북한 어디에서 전쟁을 일으키고 무엇 때문에 전쟁을 했는지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영화감독의 의도대로 필자도 이 영화를 관람하면서 꽤 많은 눈물을 흘렸던 거 같다.

영화가 끝나고 난 후 관객들이 느꼈을 것은 단지 형제가 남북으로 갈라져 있어 어쩔 수없이 전쟁을 하는 것이고 전쟁을 해도 결국 남북은 피를 나눈 형제라는 생각만 했을 것이다. 남한과 북한이 전쟁을 한 사이지만 형제이니 어디 한 형제가 힘들고 어려우면 상대방의 잘못된 행동은 접어 두고 무조건 도와줘야 한다는 내용을 은연중에 내포하고 있어 관객들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사상의 최면에 걸리지 않았나 싶다.

필자가 이 글 처음에 언급한 것처럼 예술이란 것이 이처럼 대단히 무서운 것이다. 한일 합방으로 일제시대를 겪으면서 희생된 한국국민의 수보다 더 많은 희생자를 만든 625전쟁을 치룬 남북의 관계는 이 영화 한편으로 불구대천의 원수에서 가까운 형제, 가족이 된 것이다.

이 두 영화의 감독이 이런 시나리오로 촬영한 정확한 의도는 파악하기 어렵지만 남북을 떠나 중간자적 위치에서 촬영했다는 감독의 말은 믿기 어려울 거 같다.

일반 시민들은 잘 모르겠지만 좌파 정권 10년 동안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 제일 우호적으로 다가 갔던 부문이 문화예술계다. 그들 좌파예술인들 눈에는 북한이 전쟁을 일으킨 원수가 아니라 불쌍한 형제로 보이는 모양이다. 요 며칠사이 북한이 미사일을 쏘고 핵실험을 한다며 또한 한국을 불바다로 만든다는 위협을해도 그들 좌파예술인들은 우리 형제가 하는 것인데 라는 생각을 가졌는지 묵묵부답 일 뿐이다.

보수 정권이 들어선 현재도 문화계와 예술계는 좌편향 정권 10년 동안의 무게로 좌파가 점령하고 있어 좌파의 영향권이 강해 한국의 정통 예술가들은 지금도 어려운 고초를 겪고 있다는 것을 국민들이 인식을 하고 있는지 못 내 안타까운 마음에 표현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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