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와 머스크… 이재명 대통령과 김어준선출 권력과 비선출 권력의 위험한 이유- 책임은 선출권력 책임지지 않는 비선출 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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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태수 기자 |
기술 자본이 백악관을 흔들고 있고, 한국은 정치 유튜브가 제도정치를 압박하는 시대에 있다. 진보는 김어준과 보수쪽은 전한길이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권력이 어디에서 나오는가에 있다.
대통령은 국민의 투표로 권한을 위임받는다. 국회의원은 선거를 통해 심판받는다. 정당은 지지율과 의석, 정책의 성패로 평가된다. 정부는 헌법과 법률, 국회와 언론, 시민사회의 감시 속에서 움직인다. 이것이 민주주의가 권력을 통제하는 기본 구조다.
그러나 오늘날 민주주의를 흔드는 권력은 반드시 선거를 통해 등장하지 않는다. 선출되지 않았지만 선출 권력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있다.
미국에서는 일론 머스크가 그 상징적 인물이다. 한국에서는 김어준이라는 정치 유튜브 권력이 비슷한 질문을 던지게 한다.
머스크는 기술 자본과 플랫폼, 우주 통신망과 정치자금을 통해 트럼프 권력 주변으로 들어갔다. 김어준은 방송과 유튜브, 팬덤과 정치 해석을 통해 이재명 대통령과 민주당 주변의 여론 지형에 큰 영향을 미쳐왔다.
트럼프와 머스크의 관계는 현대 민주주의가 직면한 새로운 위험을 보여준다. 머스크는 단순한 기업인이 아니다. 그는 테슬라, 스페이스X, 스타링크, X를 통해 산업 권력, 우주·안보 권력, 통신 인프라 권력, 여론 플랫폼 권력을 동시에 가진 인물이다.
전기차와 배터리 산업, 우주 발사체, 위성 인터넷, 인공지능, 소셜미디어 플랫폼까지 그의 영향권 안에 들어가 있다. 과거의 재벌이 공장과 은행을 통해 국가와 연결됐다면, 오늘의 머스크는 데이터와 통신망, 알고리즘과 플랫폼을 통해 국가와 시민사회를 동시에 흔든다.
트럼프에게 머스크는 단순한 후원자가 아니었다. 그는 돈과 플랫폼, 기술 혁신의 상징성을 제공하는 존재였다. 머스크에게 트럼프는 규제 완화, 정부 계약, 산업정책, 우주·AI·전기차 인프라에서 우호적 환경을 만들어줄 수 있는 정치 권력이었다.
이 둘의 결합은 단순한 정치적 연대가 아니라 기술 자본과 행정 권력이 서로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구조였다. 대통령 권력은 자본의 힘을 이용하고, 자본 권력은 대통령 권력을 통해 공공정책의 방향에 접근한다. 이 지점에서 민주주의는 위험한 질문 앞에 선다.
머스크는 선거로 뽑힌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장관도 아니고, 의회의 검증을 받은 공직자도 아니다. 그러나 그의 기업은 국가 인프라와 연결되어 있고, 그의 플랫폼은 여론에 영향을 미치며, 그의 정치적 선택은 선거판을 흔들 수 있다.
그가 백악관 주변에서 정책과 인사, 예산과 규제에 영향을 미친다면 시민은 그를 어떻게 통제할 수 있는가. 의회는 그를 어디까지 감시할 수 있는가. 정부 정책이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 특정 기술 자본의 미래 수익을 위한 것인지 누가 검증할 수 있는가. 그래서 일론머스크의 초창기 백악관에서 행태에 대해 우리는 참 많은 우려를 했다. 그러나 지금 일론머스크는 백악관에 없다..
미국식 기술 과두정의 본질이다. 왕관은 없지만 왕처럼 발언하고, 장관직은 없지만 장관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언론사라는 이름을 쓰지 않지만 사실상 세계적 여론 광장을 소유한다.
권력의 형식은 사적 소유이지만, 그 효과는 공적 영역 전체에 미친다. 바로 이 점에서 머스크는 민주주의가 새롭게 경계해야 할 비선출 권력의 얼굴이다.
한국에서도 이 질문은 낯설지 않다. 물론 한국에는 머스크처럼 우주산업, 전기차, 위성통신, 플랫폼을 동시에 장악한 기술 자본가가 정치 권력 주변을 지배하는 구조는 아직 뚜렷하지 않다. 그러나 한국에는 다른 형태의 비선출 권력이 있다. 정치 유튜브 권력이다. 그 중심에 김어준이라는 이름이 있다.
김어준은 한국 정치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전통 언론이 외면하거나 축소한 의제를 대중적으로 확산시켰고, 검찰 권력과 보수 언론 권력, 기득권 정치에 대한 비판적 여론을 만들어왔다.
민주·개혁 진영 지지자들에게 그는 단순한 방송인이 아니라 정치적 감각을 제공하는 해설자, 위기 때마다 진영을 결집시키는 확성기, 언론 불신 시대의 대안 채널로 기능했다.
이 역할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한국 언론의 편향성과 검찰 권력의 비대화, 보수 기득권의 여론 독점이 존재했기 때문에 김어준 현상도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향력이 커진 순간 질문도 달라져야 한다. 김어준은 선출된 권력이 아니다. 그는 장관도 아니고, 국회의원도 아니며, 정당의 공식 의사결정기구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의 방송에서 제기된 문제의식은 민주당 내부 논쟁으로 번지고, 특정 정치인에 대한 평가를 흔들며, 개혁 진영 지지층의 감정과 판단에 큰 영향을 준다.
그의 한마디가 정치권의 의제가 되고, 그의 해석이 지지층의 여론이 되며, 그의 의심이 정치적 압박으로 전환된다면 그것은 단순한 방송의 영역을 넘어선다. 그것은 권력이다.
이재명 대통령과 김어준의 관계를 바라볼 때 필요한 것은 감정적 찬반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원칙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선출된 권력이다. 그는 국민의 투표를 통해 대통령이 되었고, 헌법과 법률에 따라 책임을 진다. 국정 운영의 성과와 실패는 대통령의 몫이다.
경제가 흔들리면 대통령이 책임져야 하고, 외교가 흔들리면 대통령이 설명해야 하며, 인사가 실패하면 대통령이 비판을 감당해야 한다. 선출된 권력은 영광과 책임을 함께 진다.
반면 김어준은 책임의 구조가 다르다. 그는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지만 국정 운영의 결과에 대해 선거로 심판받지 않는다. 그의 발언이 정치적 파장을 낳아도 그는 다음 방송에서 해명하거나 방향을 바꾸면 된다. 그의 의혹 제기가 틀렸을 경우에도 제도적 책임은 제한적이다.
이것이 정치 유튜브 권력의 위험이다. 영향력은 크지만 책임은 작다. 파장은 공적이지만 지위는 사적이다. 판단은 정치적이지만 심판은 시장과 팬덤의 영역에 머문다.
이재명 대통령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바로 이 비대칭을 관리하는 일이다. 민주·개혁 진영의 대중적 에너지는 필요하다. 보수 언론과 검찰 권력, 기득권 구조에 맞서려면 시민의 감시와 여론의 힘이 필요하다.
그러나 대통령의 국정 운영이 특정 방송인이나 유튜브 팬덤의 정서에 지나치게 흔들려서는 안 된다.
선출 권력이 비선출 여론 권력의 눈치를 보기 시작하면 국정의 중심은 대통령실이나 국회가 아니라 스튜디오와 댓글창으로 옮겨간다. 이는 민주주의의 회복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왜곡이다.
트럼프와 머스크의 관계가 미국 민주주의에 던지는 교훈은 분명하다. 선출 권력이 비선출 자본 권력과 결합하면 국가는 사유화된다. 대통령의 권한이 특정 억만장자의 산업 전략과 맞물릴 때, 공공정책은 시민 전체의 이익이 아니라 특정 자본의 미래 수익을 위한 도구가 될 위험이 있다.
마찬가지로 이재명 대통령과 김어준을 둘러싼 한국적 논쟁도 중요한 경고를 준다. 선출 권력이 비선출 여론 권력과 과도하게 결합하면 정치는 팬덤화된다. 대통령의 판단이 공론장과 제도적 토론보다 특정 영향력자의 의제 설정에 끌려갈 경우, 국정은 숙의가 아니라 동원의 정치로 흐를 수 있다.
물론 머스크와 김어준을 같은 차원의 인물로 놓을 수는 없다. 머스크는 세계적 기업 제국을 가진 억만장자이고, 미국 국가 인프라와 직접 연결된 기술 자본가다.
김어준은 한국의 정치 방송인이고, 그의 권력은 자본보다 여론과 팬덤에서 나온다. 두 사람의 규모와 성격은 다르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던져야 할 질문은 같다. 당신의 영향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당신은 누구에게 책임지는가. 당신의 발언과 결정은 공공 영역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시민은 당신을 어떻게 검증할 수 있는가.
트럼프는 머스크와 같은 인물을 통해 미국 우파 정치의 새로운 동력을 얻었다. 기존 공화당 엘리트와 복음주의 세력, 백인 노동자층의 분노에 기술 자본과 플랫폼 권력이 결합했다. 그 결과 트럼프주의는 단순한 포퓰리즘을 넘어 디지털 시대의 권력 연합으로 진화했다.
돈, 데이터, 플랫폼, 분노, 음모론, 국가주의가 뒤섞인 정치 형태다. 이 구조에서 머스크는 단순한 조연이 아니다. 그는 트럼프주의가 미래 산업과 여론 플랫폼을 장악하는 데 필요한 상징이자 도구였다.
이재명 대통령의 경우는 정반대의 과제를 안고 있다. 그는 훼손된 민주주의와 민생, 국가 운영 시스템을 회복해야 하는 선출 권력이다. 따라서 그는 어떤 비선출 권력에도 국정의 중심을 넘겨서는 안 된다. 검찰 권력도 통제해야 하고, 언론 권력도 비판해야 하며, 재벌 권력도 견제해야 한다.
동시에 자기 진영 내부의 유튜브 권력, 팬덤 권력, 강성 여론 권력과도 건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이것이 진짜 민주주의 회복이다. 상대 진영의 비선출 권력만 비판하고 내 편의 비선출 권력에는 침묵한다면 민주주의의 원칙은 무너진다.
김어준을 조심해야 한다는 말은 김어준을 제거하거나 침묵시켜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권력 비판도 필요하고, 대안 언론도 필요하며, 시민의 분노를 언어화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그러나 영향력자는 영향력만큼 검증받아야 한다.
김어준의 발언이 정치적 의제가 된다면 그 발언은 언론 보도와 마찬가지로 사실 검증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의 해석이 지지층의 판단에 영향을 준다면 그 해석은 반론과 토론에 열려 있어야 한다. 그의 의혹 제기가 정치권을 흔든다면 그 의혹은 책임 있는 방식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은 김어준과의 적대가 아니다. 필요한 것은 거리다. 민주주의에서 선출 권력은 지지층의 에너지를 존중하되, 그 에너지에 포획되어서는 안 된다.
대통령은 유튜브의 박수보다 국민 전체의 삶을 봐야 한다. 팬덤의 분노보다 제도적 안정성을 봐야 한다. 진영의 환호보다 국가의 장기적 방향을 봐야 한다.
이것이 대통령과 정치 해설자의 차이다. 해설자는 의심을 던질 수 있지만 대통령은 결정을 내려야 한다. 방송인은 분노를 조직할 수 있지만 대통령은 갈등을 조정해야 한다.
유튜버는 특정 지지층을 향해 말할 수 있지만 대통령은 반대자까지 포함한 국민 전체를 상대로 국정을 운영해야 한다.
트럼프는 이 지점에서 실패한 정치의 상징이다. 그는 머스크와 같은 기술 자본, 강성 지지층, 음모론적 여론, 플랫폼 정치를 자신의 권력 유지에 활용했다.
그 결과 미국 민주주의는 제도보다 인물, 숙의보다 선동, 공공성보다 사적 이익이 앞서는 방향으로 흔들렸다. 이재명 대통령은 그 반대의 길을 가야 한다.
자신을 지지한 시민의 열망을 국정 동력으로 삼되, 특정 영향력자의 해석이나 팬덤의 압박에 국정을 맡겨서는 안 된다. 개혁은 필요하지만 개혁의 방식은 민주적이어야 한다. 적폐 청산은 필요하지만 청산의 기준은 법과 제도여야 한다. 여론의 힘은 필요하지만 여론 권력은 통제되어야 한다.
이 문제는 한국 정치 전체의 성숙도와도 연결된다. 보수 진영은 강성 유튜브의 분노 정치에 기대고, 진보 진영은 특정 해설자의 해석 정치에 기대는 순간 정당은 스스로의 사고 능력을 잃는다.
정당이 정책을 만들고, 의원들이 토론하고, 정부가 책임지는 구조가 아니라 유튜브가 의제를 던지고 정치권이 따라가는 구조가 된다. 이때 시민은 주권자가 아니라 구독자가 된다. 정치는 토론이 아니라 시청이 되고, 공론장은 댓글창으로 축소된다. 민주주의는 그렇게 서서히 가벼워진다.
일론 머스크와 김어준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민주주의의 바깥에서 민주주의 안쪽을 흔드는 인물들이다. 머스크는 자본과 기술로 흔든다. 김어준은 말과 해석으로 흔든다. 머스크는 백악관과 정부 계약, 플랫폼 소유를 통해 권력과 접속한다.
김어준은 방송과 유튜브, 팬덤과 정치 의제 설정을 통해 권력 주변에 머문다. 머스크의 위험은 국가의 사유화이고, 김어준의 위험은 정치의 팬덤화다. 둘 다 민주주의가 경계해야 할 비선출 권력의 얼굴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성공하려면 바로 이 차이를 분명히 해야 한다. 선출 권력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과 협력할 수는 있지만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 시민 여론을 듣되 특정 여론 장치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개혁 진영의 목소리를 존중하되 개혁 진영의 확성기가 국정 운영의 나침반이 되어서는 안 된다. 대통령의 책임은 지지층의 기분을 맞추는 데 있지 않다. 대통령의 책임은 국가를 운영하고, 국민의 삶을 개선하며, 민주주의의 제도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데 있다.
지금 한국 정치가 물어야 할 질문은 단순하다. 우리는 트럼프와 머스크의 미국을 반면교사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다른 얼굴의 비선출 권력에 스스로를 맡길 것인가.
기술 자본이든 정치 유튜브든,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선출 권력 위에 올라서면 민주주의는 약해진다. 그 권력이 내 편을 향해 웃고 있어도 마찬가지다. 민주주의는 적의 권력을 견제하는 제도만이 아니다. 내 편의 권력까지 검증하는 시민적 태도다.
이재명 대통령 시대의 진정한 과제는 특정 정권의 권위주의를 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검찰 권력과 언론 권력, 재벌 권력의 견제와 함께 유튜브 권력과 팬덤 권력까지 민주주의의 원칙 안으로 끌어들이는 일이다.
김어준이든 누구든 공론장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은 검증받아야 하고, 머스크든 누구든 국가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은 책임을 져야 한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커질수록 시민은 더 날카롭게 물어야 한다. 당신은 누구의 권한으로 말하는가. 당신은 누구에게 책임지는가. 당신의 영향력은 민주주의를 넓히는가, 아니면 시민의 판단을 대신 소유하는가.
트럼프와 머스크의 미국은 기술 자본이 민주주의를 우회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준다. 이재명 대통령과 김어준을 둘러싼 한국의 논쟁은 여론 권력이 제도정치를 압박할 때 어떤 위험이 생기는지를 보여준다.
두 사례의 결론은 하나다.
민주주의는 선출된 권력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을 어떻게 통제하느냐에 따라 민주주의의 품격이 결정된다. 시민이 주권자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억만장자와 플랫폼, 유튜버와 팬덤이 짜놓은 감정의 무대에서 관객으로 남을 것인가. 지금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바로 그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