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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입증해 오세요”… 산재 인정 문턱 앞에 다시 멈춰 선 노동자들

산재 처리 기간 단축에도 승인율·입증 부담은 그대로… 노동계 “제도 개선은 속도보다 구조가 핵심”

근골격계·뇌심혈관질환 등 누적성 질환, 노동자가 스스로 업무 연관성 입증해야 하는 현실

직장 내 괴롭힘·성희롱 피해 산재 신청 증가… “증거 요구 방식이 2차 피해로 이어져”

전용욱 기자 | 기사입력 2026/06/23 [08:19]

“직접 입증해 오세요”… 산재 인정 문턱 앞에 다시 멈춰 선 노동자들

산재 처리 기간 단축에도 승인율·입증 부담은 그대로… 노동계 “제도 개선은 속도보다 구조가 핵심”

근골격계·뇌심혈관질환 등 누적성 질환, 노동자가 스스로 업무 연관성 입증해야 하는 현실

직장 내 괴롭힘·성희롱 피해 산재 신청 증가… “증거 요구 방식이 2차 피해로 이어져”

전용욱 기자 | 입력 : 2026/06/23 [08:19]

[내외신문=전용욱 기자] 산재 인정의 첫 관문, 질판위 앞에 선 노동자들이 불만이 넘치고 있다. 

일하다 병을 얻은 노동자가 산업재해를 인정받기까지의 길은 여전히 멀고 복잡하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상 업무상 질병으로 산재를 신청한 노동자는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이른바 질판위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 질판위는 노동자가 앓는 질병과 업무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는지 판단하는 핵심 기구다.

 

질판위는 신청인이 제출한 의무기록, 작업환경 조사 결과, 역학조사 의견 등을 토대로 업무 관련성 여부를 의결한다. 제도상으로는 노동자의 질병과 노동환경을 종합적으로 들여다보는 절차지만, 현장에서는 이 과정이 노동자에게 또 다른 장벽으로 작동한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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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업재해 노동자가 입증해야 하는 범위가 더 넓어지고 있다(사진=내외신문)    

 

지난해 9월 고용노동부는 업무상 질병 처리 기간을 줄이기 위해 근로복지공단이 지정한 의료기관에서 추가 검사를 받도록 하는 ‘특별진찰’을 단계적으로 생략하겠다고 밝혔다. 내장 인테리어 목공, 환경미화원 등 근골격계 질환이 많이 발생하는 32개 직종이 우선 적용 대상이다.

 

노동계는 특별진찰 감축 자체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동안 산재 신청 노동자들은 심사 과정이 길어지는 동안 치료비와 생계 부담을 동시에 떠안아야 했다. 처리 기간 단축은 분명 필요한 조치다. 그러나 노동계는 속도만 빨라졌을 뿐, 산재를 인정받기 위한 구조적 부담은 그대로 남아 있다고 본다.

 

인천에서 활동하는 한 노무사는 “올해 들어 사건 처리 속도가 다소 빨라진 것은 체감된다”면서도 “기간 단축에 초점이 맞춰지다 보니 산재 승인율이나 신청인의 입증 부담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현장에서 “산재를 인정받으려면 의사를 잘 만나야 한다”는 말까지 나온다고 전했다.

 

문제의 핵심은 산재 인정 여부가 실제 노동환경이나 노동강도에 대한 평가보다 의학적 판단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점이다. 노동자의 작업 방식, 반복 동작, 장시간 노동, 현장 위험 요인 등이 충분히 반영되지 못한 채 의학적 소견 중심으로 결론이 내려질 경우, 산재 신청자는 자신의 노동이 질병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노동계는 일부 심사 과정에서 근무 기간이 일정 기준에 미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기계적인 불승인이 이뤄지는 경향도 있다고 지적한다. 노동자의 몸은 현장마다 다른 속도로 망가지지만, 제도는 때로 숫자와 서류의 칸 안에서만 판단한다는 비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질환일수록 더 높은 입증의 벽

 

산재 인정 과정에서 사고성 재해와 질병성 재해의 차이는 크다. 골절이나 절단처럼 사고 원인이 비교적 분명한 경우에는 재해 발생 시점과 원인을 특정하기 쉽다. 반면 뇌심혈관질환, 근골격계질환, 정신질환처럼 오랜 시간 누적돼 발생하는 질환은 사정이 다르다.

 

이들 질환은 특정한 하루의 사건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장시간 노동, 반복 작업, 과도한 업무량, 폭언과 괴롭힘, 조직 내 스트레스, 불안정한 고용조건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산재 심사 과정에서는 이러한 복합 요인을 노동자가 자료로 입증해야 한다. 노동시간, 업무량, 작업환경, 스트레스 요인, 직장 내 관계, 진료 기록까지 모두 신청자의 몫이 된다.

 

특히 정신질환 산재는 최근 빠르게 늘고 있다. 근로복지공단이 집계한 ‘업무상질병 정신질환 현황’에 따르면 정신질환 산재 신청 건수는 2016년 183건에서 지난해 754건으로 7배 이상 증가했다. 직장 내 괴롭힘 등에 따른 업무상 스트레스 반응으로 나타나는 적응장애 신청도 같은 기간 21건에서 240건으로 급증했다.

 

이는 직장 내 괴롭힘과 정신건강 문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높아진 결과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개인의 나약함이나 사적 문제로 치부되던 우울, 불안, 공황, 적응장애 등이 이제는 노동환경과 연결된 문제로 다뤄지고 있다. 그러나 신청이 늘었다고 해서 인정의 문턱이 낮아진 것은 아니다.

 

인천에서 노동 상담을 진행하는 ‘평등의전화’의 김현주 인천여성노동자회 상담소장은 정신질환 산재의 어려움을 단계적 입증 부담에서 찾았다.

 

그는 “정신질환 산재를 신청하는 노동자들은 먼저 직장 내 괴롭힘이 있었는지 입증해야 하고, 그다음 정신질환과 해당 사건 사이의 연관성을 다시 따져야 한다”고 말했다.

 

노동자는 피해 사실을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 피해가 실제 있었는지, 업무와 관련이 있는지, 질병으로 이어졌는지, 질병이 다른 원인이 아닌 업무 때문에 발생했는지까지 겹겹이 설명해야 한다. 산재 인정 절차는 노동자에게 ‘아팠다’는 진술만이 아니라 ‘왜 아프게 됐는지’를 행정과 의학의 언어로 번역해 오라고 요구하는 셈이다.

 

성희롱 피해 산재, 입증 과정이 또 다른 상처가 되는 현실

 

직장 내 괴롭힘 가운데 성희롱으로 인한 산재는 입증이 더욱 어렵다. 성희롱 피해는 물리적 상처처럼 남지 않는 경우가 많고, 조직 내 권력관계와 침묵의 압력 속에서 발생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피해자가 즉각 증거를 확보하기 어렵고, 문제 제기 이후 불이익이나 소문, 따돌림 등 2차 피해에 노출될 가능성도 크다.

 

그럼에도 산재 심사 과정에서는 성희롱 피해가 다른 유형의 직장 내 괴롭힘과 유사한 절차와 기준으로 다뤄지는 경우가 많다. 피해자의 진술과 사건의 맥락, 조직문화, 권력관계, 이후 발생한 불이익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야 하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증거가 무엇이냐”는 방식의 접근이 반복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현주 상담소장은 “성희롱 피해자에 대해서는 2차 피해가 없도록 사건의 맥락을 중심으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하지만 조사 과정에서 증거를 요구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경우가 많고, 피해자는 피해를 입증하는 과정에서 더 큰 정신적 고통을 겪는다”고 말했다.

 

산재 제도는 일하다 다치거나 병든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노동자가 자신의 피해를 인정받기 위해 다시 고통을 설명하고, 증명하고, 의심을 견뎌야 한다면 제도는 보호 장치가 아니라 또 하나의 문턱이 된다.

 

특별진찰 생략 등 처리 기간 단축은 행정 절차를 빠르게 만드는 변화다. 하지만 노동 현장의 목소리는 그보다 더 깊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산재 인정 제도가 노동자의 질병을 과연 노동의 결과로 충분히 바라보고 있는가. 눈에 보이지 않는 고통을 서류와 의학적 판단만으로 가려내려 하면서, 정작 일터의 구조적 위험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산재 인정의 속도만큼 중요한 것은 판단의 방향이다. 노동자가 “직접 입증해 오라”는 말 앞에서 다시 무너지는 구조라면, 제도 개선의 출발점은 처리 기간이 아니라 입증 책임과 심사 기준의 재설계가 돼야 한다. 일터에서 병든 노동자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의심이 아니라, 노동의 현실을 먼저 들여다보는 제도의 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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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과미래연구소 이사
시민포털지원센터 이사
내외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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