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한 노동운동인가”…2천원 벌기위해 목숨 건 빗속 라이더와 삼성전자 노조 사이의 간극빗속 오토바이 위의 노동자들…플랫폼은 ‘이벤트’로 위험을 외주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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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과급 15% 몇억원을 받기위한 노조와 비오는날 2천원 받기위해 배달하는 배달라이더(사진=내외신문) |
비 오는 밤이었다.
도로는 미끄러웠고 시야는 흐렸다. 그런데도 배달앱 알림은 쉴 새 없이 울렸다. “지금 배달하면 추가 2천 원.” “3건 완료 시 보너스 지급.” 플랫폼은 이벤트를 걸었고 라이더들은 빗속으로 내몰렸다.
몇천 원 더 벌기 위해 신호를 재촉하고, 젖은 도로를 질주했다. 누군가는 넘어졌고, 누군가는 다쳤다. 그러나 앱은 멈추지 않았다. 알고리즘은 감정이 없다. 실제 외국계 배달앱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데 같은 시기 대한민국 최고 수준 연봉을 받는 삼성전자 노조는 영업이익의 15%를 성과급으로 제도화해달라며 파업에 나섰다.
이 장면이 한국 사회에 묘한 충돌감을 준 이유는 단순하지 않다. 시민들이 본 것은 노동의 현실이 아니라 노동 사이의 격차였기 때문이다.
한쪽에서는 생존을 위해 비를 뚫고 몇천 원짜리 콜을 잡는다. 산재보험도 불완전하고, 휴식도 없고, 사고가 나면 개인 책임으로 떠안는다.
노동자이지만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플랫폼은 그들을 ‘개인사업자’라 부르지만 실제로는 알고리즘이 노동 강도를 지배한다. 비가 많이 올수록 배달비 이벤트는 커지고, 위험도 커진다. 위험이 곧 돈이 되는 구조다.
다른 한쪽에서는 이미 고액 연봉 체계 안에 있는 대기업 정규직 노조가 더 많은 성과 배분을 요구한다. 물론 그 요구 자체를 불법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노동자는 당연히 자신의 몫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문제는 사회가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이다.
왜 시민들이 삼성전자 노조 파업에 과거처럼 뜨거운 연대를 보내지 않는지, 그 이유를 노동계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노동운동은 원래 가장 약한 곳을 향해야 했다. 위험한 공장, 불안정한 일자리, 해고 위협 속 노동자들과 함께 서는 것이 노동운동의 출발점이었다.
그런데 지금 시민들 눈에 일부 노동운동은 가장 강한 곳에서 가장 큰 몫을 요구하는 모습으로 비친다. 그 순간 노동운동의 도덕적 명분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더 아이러니한 장면은 따로 있다. 삼성전자 노조를 비판하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정작 플랫폼 노동자들의 현실에도 무관심하다는 점이다.
배달앱 기업들은 수천억 원 이익을 내면서도 라이더 안전 문제에는 인색하다. 비 오는 날 위험수당처럼 포장된 이벤트는 사실상 위험의 외주화에 가깝다. 플랫폼은 클릭 몇 번으로 노동 강도를 조절하고, 사고 책임은 개인에게 남긴다.
한국 사회는 지금 이상한 구조 속에 갇혀 있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은 과잉 보호 논란에 휩싸이고, 플랫폼 노동은 보호 자체가 부재하다.
노동운동은 기득권이라는 비판을 받고, 플랫폼 자본은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책임을 피해간다. 정작 가장 혹독한 노동은 법과 제도의 바깥에서 방치된다.
삼성전자 노조 문제의 본질은 그래서 단순한 성과급 갈등이 아니다. 노동운동이 누구를 대변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노동의 가치가 돈의 크기로만 측정되기 시작하면 시민들은 점점 노동운동과 멀어진다. 반대로 플랫폼 노동처럼 가장 위험하고 불안정한 현장에 노동운동이 다가가지 못하면 존재 이유도 약해질 수밖에 없다.
진짜 노동의 위기는 삼성전자 회의실보다 폭우 속 도로 위에 있을지 모른다. AI와 플랫폼 시대의 노동은 더 파편화되고 더 외로워지고 있다.
과거 공장 굴뚝 아래 모였던 노동자들은 이제 각자의 오토바이 위에서 홀로 질주한다. 그런데도 한국 사회의 노동 담론은 여전히 대기업 정규직 중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노동운동도 이제 질문을 바꿔야 한다. “얼마를 더 가져갈 것인가” 이전에 “누가 가장 위험한 노동을 하고 있는가”를 먼저 봐야 한다.
그래야 시민들의 공감도 돌아온다. 노동의 본질은 숫자가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