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으시는 하나님, 현재의 모습에 속지 않는 사랑”“세리와 죄인 너머의 본래 모습”… 예수가 바라본 인간 회복의 가능성
|
![]() ▲ 한사람교회 서창희 목사 |
예수의 비유는 잃어버린 존재를 향한 하나님의 시선을 드러내는 데서 출발한다. 양 백 마리 가운데 한 마리를 잃어버렸을 때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잃은 양을 찾아 나선다.
열 드라크마 가운데 하나를 잃은 여인은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낼 때까지 부지런히 찾는다. 이 비유의 핵심은 단순히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행위가 아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하나님은 찾으시는 분이다. 잃어버린 사람을 포기하지 않고, 무너진 사람을 현재의 상태로 단정하지 않으며, 창조하신 본래의 모습을 끝까지 회복시키려는 분이다.
설교자는 이 본문을 흔히 전도에 관한 말씀으로만 이해해 왔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본문을 깊이 들여다보면 더 근본적인 메시지가 드러난다. 하나님은 사람을 바라보실 때 지금 드러난 모습만 보지 않으신다.
세리와 죄인들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눈에는 멀리해야 할 존재였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가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나 예수의 시선은 달랐다. 그들은 죄인이 맞고, 무너진 삶을 살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예수는 그 안에서 아직 회복되어야 할 본래의 모습을 보셨다.
하나님의 사랑은 현재의 모습에 속지 않는 사랑이다. 사람의 지금 상태를 부정하지 않지만, 그것이 전부라고 단정하지 않는다. 설교자는 사랑이란 상대의 현재 모습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숨겨진 더 깊은 가능성과 본래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할 때 사람에게는 새로운 눈이 생긴다. 지금의 부족함, 실패, 연약함 너머에 있는 회복된 모습을 바라보는 눈이다. 하나님은 바로 그 눈으로 인간을 바라보신다.
설교자는 자신의 결혼 경험을 예로 들었다. 과거 장인과 장모가 자신에게 딸을 맡겨 준 일을 떠올리며, 시간이 지나 딸을 키우는 아버지가 되고 나서야 그 허락의 무게를 새롭게 깨닫게 됐다고 했다. 당시 자신의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고, 미래도 불확실했다.
그럼에도 장인과 장모는 현재의 초라한 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않았다. 그 안에 담긴 가능성과 사람됨을 믿어 주었다. 설교자는 그 믿음 속에 사랑이 있었다고 고백했다.
이어 그는 데이비드 셰프의 책 『뷰티풀 보이』를 언급했다. 마약에 중독된 아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아버지의 이야기다. 아들은 회복되는 듯하다가 다시 무너지고, 또다시 일어서려다 넘어졌다. 주변 사람들은 지쳐 갔지만 아버지는 아들 안에 여전히 존재하는 본래의 모습을 붙들었다.
마약에 사로잡힌 현재의 모습이 전부가 아니며, 그 안 어딘가에는 해맑고 사랑이 가득했던 아들이 남아 있다는 믿음이었다. 설교자는 이 장면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는 방식도 이와 같다고 설명했다.
하나님은 창조하신 본래의 모습을 알고 계신다. 인간은 하나님의 선한 뜻을 위해 지음받았지만, 죄와 타락으로 인해 그 모습이 훼손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훼손된 상태 그대로 방치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인간을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잃어버린 본래의 모습을 찾아 회복시키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신앙은 자신의 현재 모습에 절망하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 지금 연약하고, 실패했고, 스스로 인정하기 어려운 마음을 품고 있더라도 하나님은 그것이 전부라고 보지 않으신다.
이 시선은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뿐 아니라 타인을 바라보는 방식도 바꾼다. 자녀, 배우자, 가족, 이웃의 현재 모습이 답답하고 화가 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질 때 사람은 다른 시선을 갖게 된다. “지금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마음이 생긴다. 이것이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 안에서 작동하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설교의 또 다른 중심은 기뻐하시는 하나님이다. 잃은 양을 찾은 목자는 친구와 이웃을 불러 “나와 함께 즐기자”고 말한다. 잃은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도 이웃을 불러 기쁨을 나눈다.
예수는 이 장면을 통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할 때 하늘에서 큰 기쁨이 있다고 말씀한다. 설교자는 여기서 기쁨의 본질을 설명했다. 기쁨은 단순히 원하는 것을 얻을 때 오는 감정이 아니다. 기쁨은 본질을 찾을 때 주어진다.
사람이 진리를 발견할 때, 어떤 원리를 찾아낼 때, 있어야 할 것이 제자리를 찾았다고 느낄 때 기쁨이 생긴다. 신앙의 기쁨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하나님 안에서 본래의 자리를 찾을 때 기쁨이 회복된다. 전도의 기쁨 역시 단순히 누군가를 교회에 데려오는 데 있지 않다. 한 사람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되어 가는 것을 볼 때 생기는 기쁨이다.
설교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는 방식도 결국 하나님을 찾게 하시는 데 있다고 말했다. 삶이 막히고, 뜻대로 되지 않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상황에 놓일 때 사람은 묻게 된다. “하나님, 왜 이 길로 인도하셨습니까. 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그 질문을 통해 사람은 하나님을 찾기 시작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찾는 과정에서 삶의 깊은 기쁨을 발견하게 된다.
예배의 기쁨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됐다. 온라인으로 설교를 듣는 것이 편하고 집중이 잘될 수 있지만, 현장 예배에는 다른 차원의 은혜가 있다. 그것은 함께 예배하는 사람들을 보는 기쁨이다.
연로한 성도가 찬양하는 모습, 청년이 온 마음으로 기도하는 모습, 삶의 아픔을 안고도 예배당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인간이 하나님 안에서 본래의 자리를 찾아가는 장면이다. 그 모습을 볼 때 신앙인은 함께 기뻐하게 된다.
설교자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야말로 잃어버린 기쁨에서 가장 멀어진 사람들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들은 세리와 죄인을 비판했지만, 정작 자신들이 하나님의 마음에서 멀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예수는 잃어버린 양과 드라크마의 비유를 통해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뿐 아니라, 기쁨을 잃은 종교인의 상태도 드러내셨다.
마지막으로 설교자는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했다. 히브리서 12장은 예수를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신 분”으로 증언한다.
예수는 십자가라는 고통스러운 현재에 속지 않으셨다. 그 앞에 있는 회복의 기쁨, 인간에게 주어질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셨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오늘의 현실만으로 미래를 판단하지 않는다. 이미 예수께서 십자가를 통해 보장하신 기쁨의 자리에서 오늘을 다시 바라본다.
현재의 가정, 자녀, 배우자, 자신의 인생이 아직 온전히 회복되지 않았더라도 낙심만이 답은 아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찾고 계신다. 사람 안에 감추어진 본래의 모습, 회복될 수 있는 가능성, 하나님 안에서 다시 기뻐할 수 있는 삶을 찾고 계신다. 신앙은 그 하나님을 따라 오늘의 현실을 새롭게 바라보는 일이다. 현재의 모습에 속지 않고, 보장된 기쁨의 미래를 붙들며, 잃어버린 본래의 모습을 찾아가는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