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혁신이 바꾼 세계 질서, 관세의 귀환 그리고 전쟁의 시대...한국의 위치기술의 비약이 세계화의 균열을 드러내고, 각국은 관세라는 오래된 무기를 다시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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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BM3는 고대역폭 메모리(High Bandwidth Memory)의 세 번째 세대로, 인공지능(AI) 및 고성능 컴퓨팅(HPC) 응용 분야에서 높은 데이터 처리 속도를 제공합니다. |
인공지능은 지금까지 등장한 어떤 기술보다 국가 간 격차를 더 빠르고 더 잔혹하게 벌리고 있다. 19세기 증기기관이 산업혁명을 만들었다면, 21세기의 AI는 산업 그 자체를 새롭게 재편하며 국가 위계 구조를 다시 짜고 있다.
GPU가 곧 국력이고, AI 개발속도가 곧 군사력이라는 말은 이제 과장이 아니다. 강대국들은 더 이상 국제 협력을 전제로 기술을 공유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술을 통제하고 공급망을 무기화하며, AI 패권을 향해 직선으로 달리고 있다.
세계화는 이 흐름 앞에서 힘을 잃었다. 1990년대부터 이어진 자유무역의 이상은 인공지능과 지정학의 충돌 앞에서 점점 작아지고 있다. 세계 각국이 공급망을 ‘재배치’한다는 명분 아래 자국 산업을 보호하는 정책을 도입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국의 IRA, CHIPS법, 반도체 장비 수출 규제, 유럽의 전략적 자율성 담론은 모두 ‘반세계화’의 교과서적 사례다. 자유무역 체제 속에서 가장 많은 이익을 얻었던 미국이 스스로 관세와 보조금 정책을 강화하며 세계화 시대의 문을 닫고 있다는 사실은 상징적이다.
관세는 다시 한 번 유효한 무기가 됐다. 관세의 귀환은 단순한 경제정책의 변화가 아니다. 인류가 어렵게 쌓아온 글로벌 생산·교역 체계를 흔드는 거대한 진동이다.
특히 AI가 생산성의 중심이 되고, AI용 반도체·데이터센터·전력 인프라가 국가 경쟁력의 핵심이 되면서, 각국은 더 이상 ‘개방 시장’이라는 이상을 신뢰하지 않는다. 대신 상대국의 성장 경로를 차단하는 공격적 관세 정책을 선택한다. 기술·관세·안보가 하나의 세트가 되어 움직이는 새로운 세계 질서가 만들어지고 있는 셈이다.
이 과정에서 전쟁은 더 짙게 세계를 감싼다. 전쟁은 과거처럼 땅을 점령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기술체계와 공급망, 그리고 에너지·식량의 흐름을 장악하기 위한 성격으로 변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에너지 공급망의 취약성을 드러냈고, 가자지구 분쟁은 중동의 불안정성을 다시 세계경제의 중심으로 끌어올렸다. 중국-대만 해협은 반도체 공급망을 둘러싼 세계 최악의 지정학적 리스크로 남아 있다. 전쟁의 양상이 달라졌고, 그 전쟁은 언제든 경제 체계와 기술 경쟁으로 이어진다.
AI 혁신, 반세계화의 관세, 그리고 전쟁. 이 셋은 서로 별개의 사건이 아니다. 서로 맞물리고 가속하며 세계 질서를 재편한다. 기술 혁신이 경제의 보호주의를 자극하고, 보호주의가 지정학적 긴장을 키우며, 군사적 균열은 다시 기술의 무기화를 가속한다. 순환 구조가 이미 시작되었고, 이를 되돌릴 수 있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
문제는 한국 같은 중견국가다. 한국은 기술 강국이면서 동시에 무역 의존도가 매우 높은 국가다. AI 혁신 경쟁에서는 주도권을 잡기 어렵고, 관세 전쟁에서는 피해를 받을 가능성이 높고, 지정학적 전쟁 구도에서는 항상 최전선에 노출되는 구조다. 이 복합 위기 속에서 한국이 생존하려면 단순한 산업정책이나 외교정책으로는 부족하다. AI 인프라 확보, 반도체 생산기지 강화, 전력·데이터센터 전략, 디지털 자본시장 구축, 중동·동남아·아프리카와의 다변적 외교까지 모두 하나의 패키지로 결합돼야 한다.
AI는 세계화를 파괴하고, 관세는 무역을 흔들며, 전쟁은 질서를 재구성한다. 이 거대한 전환기의 파고 속에서 국가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문을 걸어잠근다. 그러나 문을 걸어잠그는 것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 한국이 선택해야 할 길은 ‘닫힌 세계 속의 개방 전략’이다. 기술에서는 빠르게 추격하고, 무역에서는 새로운 파트너를 확보하며, 전쟁의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실용외교를 구축하는 전략이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이다.
AI, 관세, 전쟁이 뒤엉킨 시대.
이제 필요한 것은 과거의 세계화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 질서를 이해하고 준비하는 실질적 전략이다.
![]() ▲ 전태수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