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링컨을 가장 존경하는 이유①국민국가를 만든 대통령의 빛과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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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1809년 2월 12일 ~ 1865년 4월 15일)은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으로, 남북전쟁 기간 동안 연방을 보존하고 노예제를 폐지한 업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리더십과 도덕적 신념은 미국 역사에 깊은 영향을 미 |
링컨 대통령 이야기는 그의 출생부터 시작된다. 켄터키에서 목수였던 아버지 토머스 링컨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가난한 가정 형편 속에서도 배움에 대한 열망으로 독학을 통해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정규 교육을 1년 남짓 받는 데 그쳤지만, 그의 독서와 학습 의지는 훗날 정치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이후 인디애나와 일리노이로 이주한 링컨은 지역 정치에서 입지를 넓혀가며 결국 미합중국의 대통령직에 오르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의 결혼생활도 복잡한 양상을 보였다. 부인 메리 토드 링컨과의 관계는 사회적 배경 차이에서 오는 갈등이 끊이지 않았으며, 메리가 한때 링컨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스티븐 더글라스와 교제했던 사실은 부부 관계에 지속적인 긴장 요소가 되었다.
19세기 중반 미국 정치판은 민주당과 휘그당이 양분하고 있었다. 하지만 노예제를 둘러싼 갈등은 휘그당 내부를 분열시키고, 1854년 캔자스-네브라스카 법을 계기로 북부 휘그당 출신 인사들이 모여 공화당을 창당한다. 이 새 정당의 핵심 강령은 노예제 반대였다. 링컨은 이 공화당 소속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그의 당선은 곧 남부 11개 주의 연방 탈퇴라는 폭풍을 몰고 왔다.
남부는 사우스캐롤라이나를 시작으로 탈퇴하며 남부연합을 수립했고, 버지니아의 리치먼드를 수도로 삼아 제퍼슨 데이비스를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링컨은 당시 연방군 최고사령관직을 버지니아 출신 로버트 리에게 제안했지만, 리는 고향에 충성을 선택하며 남부군을 지휘하게 된다. 이후 북부는 유능한 장군을 찾기까지 시행착오를 거듭하다 율리시스 그랜트를 발탁하며 전세를 뒤집기 시작했다.
남북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링컨의 정치적 역량은 돋보였다. 그는 게티스버그 전투 이후 행한 연설에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는 불후의 명문을 남겼다. 이 연설은 단순한 전쟁 연설을 넘어 미국 민주주의의 정체성을 재정의한 선언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그의 유머감각과 대중적 친근함 이면에는 심각한 만성 우울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는 불행한 결혼생활과 내전의 무게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이러한 링컨의 내면을 섬세하게 그려낸 것이 2013년 영화 <링컨>이었다. 영화는 그의 인간적 고뇌와 동시에 정치적 결단의 순간들을 조명하며 다시 한번 그의 리더십을 조명했다.
1865년 4월 9일, 전쟁은 리 장군의 항복으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전쟁의 종결은 곧 비극으로 이어졌다. 불과 5일 뒤 링컨은 포드 극장에서 암살되었다. 암살은 존 윌크스 부스와 그 일당이 공모한 조직적인 시도였으며, 링컨 외에도 고위 관료들이 표적이 되었지만 부스만이 성공했다. 부스는 이후 도주 중 총격전에서 사망했다.
링컨의 죽음은 미국 현대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순간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13차 수정헌법의 통과를 위해 끈질기게 싸웠고, 노예제를 법적으로 폐지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오늘날 미국인들이 링컨을 가장 존경하는 이유는 단순한 승리자가 아닌 ‘국민국가를 창조한 건국 제2세대’로서 그의 위상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남북전쟁을 거치며 미국은 단순한 주들의 연합체를 넘어, 하나의 통합된 국가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평가가 전적으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초기에는 노예제 폐지에 적극적이지 않았으며, 심지어 자유 흑인들을 해외로 이주시킬 구상을 했던 점을 비판한다. 또한 서부 개척지에 백인 정착민 중심의 확장을 선호했으며, 남북전쟁을 통해 행정부 권력을 지나치게 비대화시켰다는 지적도 존재한다.
이처럼 링컨은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하면서도 복잡한 인물로 남아 있다. 그의 생애를 이해하는 것은 단순한 영웅 숭배를 넘어, 미국 민주주의의 본질과 한계를 통찰하는 과정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