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이름으로 저지른 야만” – IS의 폭력, 정체성의 전쟁, 그리고 문명의 경계종교인가, 권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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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S는 자신들이 이슬람 세계의 ‘정통’을 계승한다고 주장하며, 이슬람 경전을 극단적으로 해석해 무차별적인 학살과 폭력을 정당화하고 있다. |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조직 IS(ISIS)의 탄생과 그들의 잔혹한 테러 행위는 단순한 종교 분쟁이나 무장 갈등을 넘어선 전 지구적 위협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들이 내세우는 이슬람 율법 해석의 편향성, 역사적·종교적 맥락, 서구 제국주의의 유산, 그리고 종말론적 세계관을 심층적으로 해부한다.
겉으로는 신의 이름을 내세운 신성한 전쟁을 외치지만, 그 내면에는 정치적 야망과 문명 간 충돌, 정체성 혼란을 조장하는 전략이 숨겨져 있다.
IS는 자신들이 이슬람 세계의 ‘정통’을 계승한다고 주장하며, 이슬람 경전을 극단적으로 해석해 무차별적인 학살과 폭력을 정당화하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이슬람 교도들은 이들이 이슬람의 진정한 가치를 대표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슬람을 왜곡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IS의 테러 전략은 단순한 전투의 수단이 아니라 메시지이자 선전이다. 파리 테러, 런던 차량 돌진, 시리아에서의 공개 처형 등은 모두 이들이 세계에 던지는 ‘공포의 연극’이자, 자신들의 존재감을 과시하는 방식이다. 그들은 잔혹성을 무기 삼아, 현대 사회가 갖는 도덕과 인권의 개념 자체에 도전장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
역사적으로 IS의 기원은 오스만 제국의 붕괴와 칼리프제 폐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1453년 오스만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정복 이후, 이 도시는 이슬람 세계의 중심지가 되었고, 칼리프는 전 세계 무슬림의 종교적·정치적 수장으로서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1924년 터키의 케말 파샤가 칼리프제를 폐지하면서, 전통적 이슬람 정치체제는 해체됐다. 이슬람 급진주의자들에게 이는 곧 이슬람 공동체의 쇠락을 의미했으며, 그들은 칼리프제 부활을 이상향으로 삼기 시작했다.
오사마 빈라덴을 비롯한 극단주의자들은 이를 구심점 삼아 자신들의 운동에 종교적 정당성을 부여했고, 2014년 IS가 스스로 ‘이슬람 국가’를 선포하며 칼리프제를 복원한다고 선언한 것은 이 연장선상에 있다.
특히 IS가 시도한 '국가' 건설은 단순한 테러 집단의 활동을 넘어선다. 이들은 점령한 지역에 자신들만의 샤리아(이슬람 율법)를 적용하며, 그들의 가치관에 맞지 않는 이교도, 이단자, 여성, 아이들을 가차 없이 탄압하고 제거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야지디족 학살이다.
2014년 신자르에 진입한 IS는 5개월간 약 5천 명의 남성을 학살했고, 여성과 아이들은 노예로 삼았다. 남성들의 머리는 공공장소에 전시되었고, 여성들은 성노예로 거래되었으며, 이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잔인한 군주들을 연상케 한다. IS는 이 모든 행위를 샤리아의 이름으로 정당화했으며,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신의 뜻이라고 믿는다.
문제는 이러한 해석이 결코 전통 이슬람 율법 전체를 대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샤리아는 본래 다양한 학파와 해석이 존재하는 유연한 체계이며, 평화와 자비, 공동체 질서를 중시하는 원칙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IS는 이 중 가장 강경한 해석만을 채택했으며, 이를 따르지 않는 이슬람 내부 종파인 시아파조차 ‘변절자’로 간주하고 무차별 살해 대상으로 삼는다.
기독교인이나 유대인은 일정 세금을 내면 2등 시민으로 생존할 기회를 주지만, 야지디족처럼 이슬람 경전에 명확히 언급되지 않은 집단은 ‘악마 숭배자’로 낙인찍고 존재 자체를 말살하려 했다. 이러한 태도는 종교의 교리를 넘어선 사상의 우월성과 배타성, 즉 일종의 문명 파시즘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극단주의는 어디에서 기원하는가. 다큐멘터리는 그 배경에 서구 제국주의의 흔적과 현대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이후, 서구는 이슬람 세계를 ‘후진적’ 문명으로 규정하며 문명화의 대상으로 삼았다. 식민지 시기 동안 이슬람 문화는 철저히 억압당했고, 서구식 교육, 정치, 언론 구조가 강제 이식되면서 전통적 공동체는 붕괴되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무슬림들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고, 서구에 동화되지도 못한 채 주변부로 밀려났다. 특히 유럽의 무슬림 이민자들은 문화적, 종교적, 경제적으로 배제당한 이중 소외 속에 살고 있다. IS는 바로 이 회색지대를 공략했다. 프랑스, 영국, 독일 등지의 젊은 무슬림들에게 ‘자신이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존재’라는 정체성의 위기를 파고들며, 극단적인 신념과 전쟁의 대열로 끌어들인다.
다큐멘터리는 프랑스 혁명과 IS의 유사성도 지적한다. 2015년 파리 바타클랑 극장에서 발생한 테러는 근대적 테러의 전형이었으며, 이는 공포와 처벌을 정치적 수단으로 삼는 ‘공포 정치’의 현대적 변형이었다.
생드니 대성당은 프랑스 왕정과 혁명기의 도덕심판이 교차하는 상징적 공간인데, IS는 이 역사적 상징을 의도적으로 노리고 공격했다. 프랑스 혁명기의 단두대가 ‘도덕을 가르치는 공공 처형의 장소’였듯, IS도 자신들의 처형을 인터넷과 미디어를 통해 대중에게 생중계하면서, 이슬람 율법이란 명분을 통해 마찬가지의 도덕심판을 가하려 했다.
다큐멘터리는 IS의 종말론적 세계관도 주목한다. 이들은 최후의 전쟁이 시리아의 다비크라는 마을에서 일어날 것이라는 하디스를 근거로, 자신들의 활동을 ‘종말의 신호’로 포장한다. 이들은 서구 문명과의 전면전을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간주하고, 파괴와 죽음을 통해 새로운 세계질서를 창조하려 한다.
이는 기독교 근본주의, 유대교 메시아주의, 힌두 민족주의 등 타 종교 내 극단주의와도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결국, 이들의 목표는 단순한 영토 확장이나 정치 권력의 확보가 아니라, 자신들만의 ‘신성한 질서’를 세상 위에 강제로 덧씌우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큐멘터리는 IS와 싸우는 것이 단지 테러와의 전쟁이 아니라, 인류 보편의 가치와 문명 질서, 그리고 다원적 사회에 대한 방어임을 강조한다.
IS의 폭력은 단지 중동의 문제가 아니라, 서구 사회 내 무슬림 이민자, 젠더와 인권, 다문화 가치 등과 얽힌 복합적인 문제다. 그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규칙 자체를 문제 삼고 있으며,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왜곡된 신념의 무기로 삼아 문명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IS는 끝났다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은 형체를 바꾸어 인터넷 속으로, 소셜미디어의 해시태그 속으로, 외로운 청년들의 정체성 혼란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우리가 이들과 싸워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들의 세계가 우리의 미래가 되지 않도록, 그들의 야만이 우리의 공존을 파괴하지 않도록, 진실과 다름, 연대와 관용이 살아 있는 세상을 지키기 위해서다. 당신이 사는 곳이 파리든 서울이든, 이 전쟁은 당신과 무관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