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의 여인, 역사를 꿰뚫다” – 마거릿 대처의 성공과 몰락냉전의 회오리 속에 선 영국, ‘대처리즘’의 탄생과 철강보다 강한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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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의여인의 별명을 가진 마거릿대처 |
하지만 ‘철의 여인’의 리더십은 시간이 지날수록 균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경제가 성장하는 동안에도 산업 구조 재편 과정에서 수많은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었고, 특히 탄광 폐쇄로 인한 광산촌의 붕괴는 대처 정권에 대한 국민적 분노를 키웠다. 강력한 노동조합과의 충돌은 1984년 광부 파업에서 극에 달했으며, 대처는 강경 대응을 선택함으로써 갈등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대처는 ‘분열의 지도자’라는 평가도 함께 받았다.
또한 그녀의 정책 중 가장 큰 반발을 일으킨 것은 1990년에 시행된 ‘인두세(Poll Tax)’였다. 전국민에게 동일하게 세금을 부과하는 이 제도는 저소득층에게는 지나치게 가혹한 부담이 되었고, 런던에서는 대규모 폭동이 일어날 만큼 격렬한 저항을 불러왔다.
이는 여당 내에서도 분열을 초래했고, 오랜 동지들이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결국 같은 해, 당내 쿠데타에 가까운 방식으로 대처는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는 퇴진 이후에도 강단 있는 정치적 신념을 끝까지 유지했다. 자신의 회고록과 연설을 통해 여전히 ‘소신’을 이야기했고, 보수주의에 대한 확고한 철학을 공유했다.
그러나 대중과의 거리감은 끝내 좁혀지지 않았고, 생전에도 사후에도 그녀는 “영국을 개혁한 위대한 지도자”라는 평가와 “사회적 약자를 무너뜨린 독재자”라는 상반된 인식을 동시에 안고 있었다.
2013년 4월,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영국 전역은 조용한 애도와 함께 논쟁이 재점화되었다. 그를 기리는 동상과 전기들이 발표되는한편, 어떤 도시에서는 그의 사망을 축하한다는 퍼레이드까지 벌어졌다.
대처의 삶은 성공과 실패, 존경과 증오, 혁신과 분열이라는 모든 요소가 응축된 20세기 정치사의 복합적 상징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마거릿 대처의 ‘철’은 단단함의 상징인 동시에, 굽힐 줄 모르는 고집의 상징이기도 했다. 역사는 그녀의 행보를 단순히 칭송하거나 비판할 수 없다. 대처의 이름은 강철처럼 빛나는 리더십이 남긴 복잡한 그림자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세계 정치의 거울로 비춰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