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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의 해방과 넬슨 만델라

샤프빌의 총성이 울린 날, 세계는 더 이상 침묵하지 않았다

경제제재와 문화보이콧, 세계는 인종차별을 범죄로 규정하다

만델라의 석방과 민주주의의 여명, 남아공은 역사의 심판을 마주했다

유경남 기자 | 기사입력 2025/04/02 [05:26]

남아프리카의 해방과 넬슨 만델라

샤프빌의 총성이 울린 날, 세계는 더 이상 침묵하지 않았다

경제제재와 문화보이콧, 세계는 인종차별을 범죄로 규정하다

만델라의 석방과 민주주의의 여명, 남아공은 역사의 심판을 마주했다

유경남 기자 | 입력 : 2025/04/02 [05:26]

샤프빌 학살은 국제사회의 양심을 일깨운 결정적 사건이었다. 1960년 3월 21일, 남아프리카 공화국 트란스발 지방의 샤프빌에서 벌어진 이 참극은 무장하지 않은 흑인 시위대가 인종차별 정책에 항의하던 중 경찰의 무차별 사격으로 최소 69명이 사망하고 180여 명이 부상당한 사건으로, 세계 언론은 이 사건을 대서특필하며 남아공의 잔혹한 인종차별 실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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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시행된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는 단순한 차별 정책이 아닌, 체계적으로 기획된 법적·제도적 억압 시스템이었다.    

 

당시 남아공 정부는 ‘통행증법’을 근거로 흑인의 이동과 거주를 제한하고 있었고, 이에 항의하기 위해 모인 평화적 시위대에 대한 무력 진압은 국제 여론을 충격에 빠뜨렸다.

 

유엔은 즉각 남아공 정부의 인권 유린을 비판하며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의 철회를 촉구했고, 이는 남아공을 국제사회에서 점차 고립시키는 시발점이 되었다. 냉전 구도 속에서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던 강대국들조차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 앞에서는 더 이상 남아공의 정책을 묵인할 수 없게 되었고, 각국은 외교적 압박 수위를 단계적으로 높여가기 시작했다.

 

유엔은 1962년부터 남아공에 대한 무역과 무기 수출 금지를 권고하는 결의안을 채택했으며, 이후에도 반복적으로 인종차별 정책 철폐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1973년에는 아파르트헤이트를 반인도범죄로 규정하는 국제협약이 유엔 총회에서 채택되었고, 이는 남아공 정부에 대한 국제법적 비판을 정당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비록 유엔의 제재 조치가 강제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수 회원국의 연대된 의지는 국제 여론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특히 아프리카 국가들은 남아공과의 외교 단절을 선언하며,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를 대륙 전체에 대한 모욕으로 규정했다.

 

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 역시 비동맹 운동의 기조 아래 남아공을 국제사회에서 고립시키는 데 동참했으며, 점차 그 범위는 유럽과 북미로 확산되었다. 미국과 영국은 초기에는 전략적 이해관계를 이유로 남아공과의 관계를 유지했지만, 자국 내 시민사회의 비판과 의회 차원의 압력이 강해지면서 점차 입장을 전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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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국과 유럽의 대중매체와 학계, 시민단체들은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를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스티브 비코의 죽음을 다룬 영화 <크라잉 프리덤>이나, U2, 피터 가브리엘 같은 세계적인 뮤지션들의 반아파르트헤이트 활동은 대중의 인식을 급격히 변화시켰다.

 

미국 대학가에서는 남아공에 투자한 기업들의 철수를 요구하는 캠페인이 확산되었고, 이는 결국 1986년 미국 의회가 '포괄적 반아파르트헤이트법(Comprehensive Anti-Apartheid Act)'을 통과시키는 데까지 이어졌다. 레이건 행정부는 초기에는 거부권을 행사했으나, 초당적 압력에 밀려 결국 법안을 수용했다.

 

이 법은 미국 기업들의 남아공 신규 투자 금지, 제품 수입 제한, 공항 운항 금지 등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경제적으로 남아공 정권을 압박하는 직접적 수단이 되었다. 영국 역시 1985년부터 남아공 정부에 대한 대출을 제한하고, 석유 수출을 중단하는 등 경제 제재에 동참했다.

 

다국적 기업들도 이미지 타격을 우려해 남아공에서 철수하거나 사업 축소를 단행했고, 이는 남아공의 금융 및 제조업 분야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이러한 외부의 압력은 남아공 내부 사회의 긴장과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다. 경제 제재로 인한 경기 침체는 실업률과 빈곤율을 악화시켰고, 도시 흑인 거주지역에서는 생존을 위한 투쟁과 함께 정치적 저항이 격화되었다.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와 범흑인 의회(UDF)는 지하조직과 비폭력 투쟁을 병행하며 민주화 요구를 확산시켰고, 젊은 백인들 사이에서도 기존 체제에 대한 회의감이 번지기 시작했다.

 

1985년 이후 남아공 전역에서는 소요 사태와 파업, 거리 시위가 끊이지 않았으며, 이는 정부의 강경한 탄압과 다시 충돌하는 악순환을 반복하게 되었다. 백인 정권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군경을 동원해 시위를 진압했지만, 민중의 분노를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특히 백인 지식인층과 종교계, 일부 정치인들조차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의 지속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고, 내부 분열은 정권의 기반을 잠식해갔다.

 

남아공 정부는 이런 위기 상황 속에서도 아파르트헤이트를 유지하기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를 강화했고,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탄압도 한층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 넬슨 만델라는 1964년 이래 로벤 섬에 수감되어 있었고, 국제사회는 그의 석방을 지속적으로 요구했지만, 남아공 정부는 이를 완강히 거부하며 오히려 만델라를 포함한 정치범에 대한 접촉을 차단했다.

 

그러나 1988년 만델라의 건강 악화와 더불어, 정부 내 일부 실용주의 세력은 석방과 협상을 모색하기 시작했고, 이 과정은 비공식적 채널을 통해 점진적으로 진행되었다. 민간 차원의 대화 시도가 늘어나면서, 정권 내에서도 점차 유화론이 힘을 얻게 되었고, 이는 프레데릭 데 클레르크 대통령의 등장과 함께 현실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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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넬슨만델라는 감옥 안에서도 동료 수감자들과 정치 토론을 지속했고, 간수들에게조차 존경받을 만큼 품위를 유지했다.    

 

데 클레르크는 1989년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아파르트헤이트 종식을 위한 일련의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으며, 1990년 2월 11일,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만델라는 석방되었다. 이 순간은 남아공 역사에서 가장 상징적인 전환점이자, 국제사회의 압력과 내부 저항이 만들어낸 결정적 성과였다.

 

만델라의 석방 이후 남아공은 급속히 민주화의 길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아파르트헤이트 관련 법률은 폐지되었고, 모든 인종에게 정치 참여가 허용되는 방향으로 헌법 개정이 진행되었다. 유엔과 각국은 이러한 변화를 지지하며 남아공에 대한 제재를 해제하기 시작했고, 남아공은 1994년 역사상 첫 자유총선에서 만델라를 대통령으로 선출하며 다인종 민주주의 국가로 거듭났다.

 

이는 단지 남아공 내부의 승리만이 아니라, 인권과 자유를 위한 국제 연대의 상징적인 결과로 평가되었다. 남아공 사례는 냉전의 논리를 넘어선 도덕적 외교와 시민사회의 역할을 강조하는 전환점이 되었으며, 이후 국제사회가 인종차별, 독재, 탄압에 어떻게 대응할지를 규정하는 기준점이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아파르트헤이트의 붕괴는 단지 하나의 제도 철폐를 넘어서, 인간 존엄성과 정의를 향한 보편적 투쟁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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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시민신문 대표
시민포털 전남 지부장
man908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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