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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서 피어난 자유의 철학, 만델라가 남긴 세계 인권 운동의 영원한 유산

“법의 이름으로 짓밟힌 존엄” – 아파르트헤이트와 넬슨 만델라의 인권 서사

전용욱 기자 | 기사입력 2025/04/02 [05:17]

감옥에서 피어난 자유의 철학, 만델라가 남긴 세계 인권 운동의 영원한 유산

“법의 이름으로 짓밟힌 존엄” – 아파르트헤이트와 넬슨 만델라의 인권 서사

전용욱 기자 | 입력 : 2025/04/02 [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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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넬슨 만델라의 인종 차별 철폐와 그 이후 남아공의 역사는 정치적 해방을 이뤄냈지만, 경제적 불평등은 해결되지 않았다(사진=픽사베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시행된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는 단순한 차별 정책이 아닌, 체계적으로 기획된 법적·제도적 억압 시스템이었다.

 

이 제도는 백인 소수 정권이 흑인 다수를 철저히 지배하고 통제하기 위해 국가적 차원에서 인종 차별을 합법화하고 구조화한 것이며, 단순한 사회적 갈등을 넘어선 정치적 폭력의 결정체였다.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는 출생부터 거주, 교육, 이동, 노동, 정치 참여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삶 전반을 인종에 따라 분류하고 차별했다. 특히 흑인에게는 기본적 시민권조차 부여하지 않았고, 그 존재 자체를 국가 시스템 내에서 부정했다.

 

이 같은 억압적 통치의 핵심에는 ‘반투 자치법(Bantu Authorities Act)’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법은 흑인들을 남아공 국토의 불과 13%에 불과한 좁은 지역에 강제로 거주하게 하며, 이들을 ‘자국민’이 아닌 ‘외국인 노동자’로 간주하게 만들었다.

 

이는 흑인을 사회적 외곽으로 몰아냄과 동시에, 값싼 노동력으로 착취하기 위한 고도로 계산된 법적 장치였다. 흑인 노동자들은 백인 지배층이 소유한 공장과 광산, 농장에서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시달렸고, 도시 내 이동조차 철저히 통제되었다.

 

이들은 ‘돕 패스(Dompas)’라 불리는 신분증을 항상 지니고 다녀야 했으며, 경찰은 이를 빌미로 무차별 검문, 체포, 구금을 자행했다. 신분증이 없으면 직장을 잃거나 가족과 생이별을 해야 했고, 심지어는 구타와 총격까지도 일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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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시행된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는 단순한 차별 정책이 아닌, 체계적으로 기획된 법적·제도적 억압 시스템이었다.    

 

아파르트헤이트의 가장 잔혹한 측면은 바로 가족과 공동체의 파괴였다. 노동을 위해 도시로 간 흑인 남성은 가족을 데려올 수 없었고, 이로 인해 가족 단위의 삶은 해체되었다. 부모를 잃거나 버림받은 아동들은 방치된 채 떠돌았고, 이들에 대한 교육과 복지 시스템은 존재하지 않았다. 전체 사회가 분열되며, 흑인 공동체는 생존조차 위태로운 상태로 내몰렸다.

 

백인 중심 정부는 이를 ‘질서’와 ‘안정’의 명목으로 정당화했지만, 실상은 전면적 억압 체제였다. 이 같은 제도적 폭력은 인종 간 갈등을 심화시키고, 남아공 사회 전체의 윤리적 기반을 붕괴시켰다. 법의 이름으로 자행된 비인간적 행위는 국제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나치 독일의 인종 청소와도 비교되며 인류사에 오점을 남긴 비극으로 기록되었다.

 

이처럼 압도적인 억압의 시기, 남아공 흑인 사회는 절망 속에서도 저항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넬슨 만델라라는 인물이 있었다. 1918년 트란스케이 지역에서 족장 가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전통과 공동체 속에서 성장하며, 흑인 사회의 존엄성과 연대를 체득했다.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두각을 보였던 그는 포트 헤어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며, 백인 중심 사회에서 흑인도 법의 힘으로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음을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의 신념을 번번이 짓밟았다. 그가 변호사가 되어도 법정은 그의 목소리를 허용하지 않았고, 심지어 변호인 자격마저 박탈당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러나 만델라는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1952년, 흑인을 위한 최초의 법률 사무소를 요하네스버그에 열고, 수많은 빈곤층 흑인들의 법률 문제를 무상으로 해결해주었다. 동시에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에 참여하여 정치적 운동에도 힘을 실었다.

 

그러던 중, 1960년 남아공 역사상 최악의 사건 중 하나로 꼽히는 ‘샤프빌 학살 사건’이 발생한다. 이는 신분증 제도에 반발해 평화 시위를 벌이던 흑인 시위대를 경찰이 무차별적으로 총격한 사건으로, 현장에서만 69명이 사망하고 180여 명이 부상당했다. 총알은 시위대를 향해 정면이 아닌 등 뒤에서 발사되었으며, 이는 시위대가 도망치던 중에 피격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이 사건은 남아공 국내는 물론, 국제사회의 커다란 분노를 촉발시켰다. 유엔은 즉각적으로 인종 차별 정책의 중단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제출했고, 전 세계에서 남아공 제품과 기업에 대한 보이콧 운동이 일어났다. 하지만 남아공 정부는 오히려 검열과 탄압을 강화하고, 만델라가 속한 ANC를 불법 단체로 지정하며 대대적인 정치 탄압을 개시했다.

 

이 시점을 기점으로 만델라는 평화적 시위만으로는 아파르트헤이트를 무너뜨릴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게 된다. 이후 그는 ANC 내에서 무장 투쟁 조직인 ‘우움콘토 웨 시즈웨(Umkhonto we Sizwe)’, 즉 ‘민족의 창’을 조직하고, 본격적인 무장 투쟁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그는 에티오피아, 알제리, 쿠바 등지에서 군사 훈련을 받았고, 귀국 후에는 발전소, 송전탑, 통신 시설 등 백인 정권의 상징적 기반 시설을 정밀 타격하는 방식으로 투쟁을 전개했다. 이는 민간인을 직접 겨냥하지 않는 제한적 무력 저항이었지만, 남아공 정부는 이를 내란죄로 규정하고 만델라를 국가의 ‘최고위 수배자’로 지명했다.

 

1962년, 그는 정부의 내사망에 의해 체포되어 이후 ‘리보니아 재판’으로 불리는 장기 재판 끝에 종신형을 선고받고, 악명 높은 로벤섬 감옥에 수감된다. 그러나 그의 구금은 오히려 국제사회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넬슨 만델라 석방 운동’은 전 세계에서 벌어지게 된다.

 

감옥에서의 27년은 그의 정신과 철학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그는 감옥 안에서도 동료 수감자들과 정치 토론을 지속했고, 간수들에게조차 존경받을 만큼 품위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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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넬슨만델라는 감옥 안에서도 동료 수감자들과 정치 토론을 지속했고, 간수들에게조차 존경받을 만큼 품위를 유지했다.    

 

만델라의 인생은 단순한 저항의 연속이 아닌, 진실과 화해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긴 여정이었다. 결국 1990년, 국제사회의 압력과 남아공 내부의 변화 요구 속에 그는 석방되었고, 이후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되며 아파르트헤이트의 종식을 상징하게 된다.

 

 

넬슨 만델라는 한 사람의 생애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를 견뎌냈고, 국가와 세계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한 인물이었다.

 

그의 인생은 인종과 국경을 넘어선 인권의 상징이 되었으며, 억압의 역사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과 자유, 정의를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 살아있는 증거로 남았다. 그의 투쟁과 사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평등과 차별에 맞서는 이들에게 귀중한 영감과 교훈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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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과미래연구소 이사
시민포털지원센터 이사
월간 기후변화 기자
내외신문 전북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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