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아버지가 아끼시던 도자기를 실수로 깨뜨렸던 일이 떠오릅니다.
그 조각들을 조용히 치우고 아무렇지 않은 척 지내려 했지만, 아버지가 그 사실을 알아차릴까 두려워 매일 눈치를 봐야 했습니다. 괜히 목소리가 낮아지고, 얼굴을 잘 들 수 없었던 그 날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마음이 바로 죄를 지었을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마음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가복음 11장 4절에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줍니다. 바로 회개입니다.
죄를 지으면 사람은 하나님이 무섭고 멀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숨고 싶고, 피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그 죄를 십자가 앞에 가지고 나가 회개하면, 하나님과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오히려 그분과의 관계가 깊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고백하고 돌아오기만 하면 언제든지 품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을 보면, 죄를 지은 이들이 많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사울 왕과 다윗입니다. 두 사람 모두 죄를 지었지만, 차이는 죄를 어떻게 대했는가였습니다. 사울은 계속해서 변명으로 일관했습니다. 반면 다윗은 나단 선지자가 그의 죄를 지적하자, 즉시 회개했습니다. 결과는 누구나 아는 대로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다시 쓰임받았고, 사울은 버림받았습니다.
또 하나의 대비되는 인물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와 베드로입니다. 두 사람 다 예수님을 배신했지만, 베드로는 통곡하며 회개했고 결국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유다는 죄책감에 눌려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결국 죄를 지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죄를 어떻게 다루느냐가 문제입니다.
이 시대를 보면, 죄의 기준이 흐려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문화라는 이름 아래 혼전동거나 동성애가 미화되고, 사람들은 더 이상 죄라는 단어를 쓰기를 꺼려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습니다. 시대가 바뀌고 법이 바뀌어도, 죄는 죄입니다. 기준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며, 인간의 생각이나 분위기가 그것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회개는 죄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감추지 않고, 포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용기에서 출발합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수가성 여인은 남편을 다섯이나 바꿨던 여인이지만,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드러내고 회개함으로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저는 종종 저 자신에게 묻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죄에 민감한가?” 많은 사람들이 음란죄나 도둑질 같은 눈에 보이는 죄에는 회개하지만, 주님을 삶의 중심에서 밀어내고 내 뜻대로 살았던 작은 교만은 돌아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이런 작은 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우리의 마음을 귀히 보십니다.
이사야 1장 18절에서 하나님은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깊고 크고 부끄러운 죄라 하더라도, 하나님은 보혈로 씻어주십니다. 회개는 우리 인생에서 가장 강력한 회복의 길입니다.
흰 옷, 양털 같은 삶. 그것은 예수님의 보혈로 덮이고, 성령의 의가 내 안에서부터 밖으로 드러날 때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로 그분께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때, 두려움은 사라지고 하나님과의 깊고 친밀한 관계가 다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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