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신앙을 앞세운 전쟁의 아이러니신앙의 이름 아래, 피로 물든 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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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십자군 전쟁은 11세기 말부터 13세기 후반까지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이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고자 벌인 일련의 군사 원정을 말합니다. |
십자군 전쟁은 중세 유럽에서 벌어진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종교적 신념과 정치적 야망이 복합적으로 얽힌 전쟁이었다. 일반적으로 십자군은 신앙을 위해 싸운 정의로운 전사들로 묘사되지만, 실상은 그보다 훨씬 복잡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당시 유럽은 이슬람 세계를 광신적이고 폭력적인 집단으로 인식했지만,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면 오히려 중세 이슬람 사회는 유럽보다 개방적이고 진보된 문명을 이루고 있었다.
이슬람 사회는 수학, 기하학, 천문학, 자연과학 등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르네상스 이전의 유럽을 압도하는 수준의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다. 또한, 종교적인 관용 정책을 유지하며 정복지의 주민을 강제 개종시키지 않았고, 개종하지 않은 이들에게 부과된 세금 역시 비잔티움 제국의 일반 세금보다 가벼워 오히려 환영받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중세 유럽에서는 이러한 사실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으며, 이슬람에 대한 공포와 왜곡된 인식이 십자군 결성을 촉진하는 주요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이슬람의 신 ‘알라’와 기독교의 신 ‘야훼’는 사실 같은 뿌리를 가진 존재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모두 구약성서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모세, 아브라함, 노아 등의 예언자를 공유한다. 그러나 세 종교는 미묘한 교리 차이로 인해 서로를 ‘이단’으로 간주했고, 특히 예루살렘을 둘러싼 성지 논쟁은 지속적인 갈등을 유발하는 핵심 요소였다.
7세기에 무함마드가 창시한 이슬람은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며 서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에서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후 셀주크 투르크 제국이 등장하면서 이슬람 세력은 더욱 강성해졌고, 1071년에는 비잔티움 제국의 군대를 패퇴시키며 소아시아 일대를 장악했다. 이에 위기를 느낀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교황 우르바누스 2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를 계기로 십자군이 조직되었다.
그러나 십자군의 명분이었던 ‘예루살렘 탈환’은 실질적인 의미가 크지 않았다. 이미 638년부터 예루살렘은 이슬람의 통치 아래 있었으며, 이슬람 지배자들은 기독교 성지를 존중하고 관리하며 유럽 각지의 순례자들에게도 개방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은 이를 성전(聖戰)으로 규정하며 대규모 군대를 조직했고, 이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와의 권력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반영된 것이었다.
십자군 결성 과정에서 유럽 전역에서는 이슬람과 이교도에 대한 증오가 확산되었고, 예루살렘 성지 탈환에 대한 열광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1095년, 프랑스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십자군 참가자들에게 과거의 모든 죄를 사면해 주겠다고 선언했다. 이로 인해 십자군은 본래 계획된 기사 중심의 정예 부대에서 벗어나, 종교적 열정에 사로잡힌 수많은 자생적 집단들로 변질되었다.
이들은 통제되지 않은 무질서한 군대로 변했고, 성지로 향하는 길목에서 수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일부 십자군은 출정 과정에서 이미 식량과 보급이 부족해지자 동유럽 지역에서 약탈을 감행했다. 농민 십자군의 약탈은 ‘성전 수행’이라는 명분 아래 이루어졌지만, 당하는 백성들에게는 그저 끔찍한 재앙이었다. 이들은 점차 전쟁 목적을 잊고 단순한 도둑 집단으로 변질되었으며, 결국 이슬람군과의 첫 전투에서 무력하게 대패했다.
일부 십자군 집단은 전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헝가리에서 유대인 학살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들은 이슬람과 싸우기도 전에 현지 민중들의 분노를 사 전멸하는 어이없는 최후를 맞이했다. 이후 정규군이 주도한 십자군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침내 1099년, 예루살렘을 점령한 십자군은 과거 이슬람 지배자들이 유지했던 관용적인 정책과는 정반대로, 여자와 어린이를 포함한 수십만 명의 유대교 및 이슬람 신자들을 학살했다. 이 같은 비인도적 행위는 당시 이슬람 세계를 경악하게 만들었고, 유럽 기독교도들의 도덕성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켰다.
![]() ▲ 예루살렘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도시로, 다양한 문화와 종교의 중심지 |
십자군의 예루살렘 점령은 약 100년 동안 지속되었지만, 결국 다시 이슬람 세력에게 빼앗겼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새로운 십자군이 조직되었으나, 대부분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막대한 피해만 남겼다. 십자군이 이교도만을 목표로 삼았던 것도 아니다. 전쟁이 지속되면서 십자군의 칼끝은 유대인과 동유럽 민중들에게까지 향했고, 점차 본래의 목적을 잃어갔다.
십자군 전쟁은 단순한 종교 전쟁이 아니라, 중세 유럽의 정치, 경제, 사회적 구조가 복합적으로 얽힌 거대한 사건이었다. 그 과정에서 종교적 신념과 광신의 경계가 희미해졌고, 신앙을 앞세운 폭력이 어떻게 악용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정의의 전사’라는 십자군의 이미지는 중세 이후 서양 문화와 미디어를 통해 지속적으로 미화되었지만, 역사적 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십자군은 신앙과 정의의 이름 아래 시작되었지만, 실상은 탐욕과 피로 얼룩진 전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