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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과 훈민정음, 세종의 경영 철학

천둥과 번개 속에서 얻은 깨달음, 글자를 알지 못한 친구의 이야기

손자병법이 남긴 가르침, 싸우지 않고 이기는 법을 배우다

문자가 없는 백성, 배우지 못하는 한계를 넘어서다

전용현 기자 | 기사입력 2025/02/01 [10:01]

손자병법과 훈민정음, 세종의 경영 철학

천둥과 번개 속에서 얻은 깨달음, 글자를 알지 못한 친구의 이야기

손자병법이 남긴 가르침, 싸우지 않고 이기는 법을 배우다

문자가 없는 백성, 배우지 못하는 한계를 넘어서다

전용현 기자 | 입력 : 2025/02/01 [10:01]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게 된 배경에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자리하고 있다. 미국 동화책 <킹 세종의 비밀>에 등장하는 이야기에서 그는 대궐로 들어오기 전까지 사가에서 지내며 동네 아이들과 뛰어놀았다. 당시의 유년 시절은 자연과 가까운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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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민정음은 조선 세종대왕이 1443년에 창제하고 1446년에 반포한 우리나라의 고유 문자 체계로, 그 역사적 가치와 아름다움이 담긴 다양한 사진 자료가 존재합니다. 이러한 이미지는 훈민정음의 독특한 서체와 구조를 감상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세종은 하루 중 글공부가 끝난 뒤에는 늘 들판을 뛰어다니며 친구들과 어울려 놀았다. 글공부만이 세상의 전부라 여기던 그에게 동네 아이들은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들 중에는 세종보다 나이가 많아도 글을 읽지 못하는 친구가 있었고, 농사꾼의 아들도 있었다. 그는 비록 문자를 모르지만 자연의 이치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세종과의 대화 속에서 그 차이가 분명히 드러나곤 했다.

 

어느 날, 세종은 정원에서 어린 친구들과 놀다가 갑작스럽게 소나기가 내리고 천둥과 번개가 치는 광경을 목격했다. 하늘은 시커먼 먹구름으로 뒤덮였고, 번개가 번쩍이는 순간 커다란 천둥소리가 들렸다. 세종은 공포에 질려 얼굴이 노래지고 식은땀을 흘리며 몸을 떨었다.

 

그러나 농사꾼의 아들이었던 친구는 겁을 먹지 않고 오히려 세종의 손을 잡으며 이렇게 말했다.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리는 건 순서가 있어. 번개가 친 다음에 숫자를 세어 봐. 하나, 둘, 셋, 넷, 다섯… 이렇게 숫자를 센 다음 천둥이 울리면, 그만큼 벼락이 떨어진 곳이 멀리 있다는 뜻이야. 만약 숫자를 셋까지밖에 못 세고 천둥이 울리면, 벼락이 가까이 친 거야.” 세종은 순간 놀랐다.

 

그는 글을 아는 자신이 더 많이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자연에서 자란 친구는 세종이 모르는 이치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책을 통해 배우는 지식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그때 처음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또 한 번의 놀라움은 친구가 한자를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세종은 천둥이라는 말을 듣고 땅바닥에 한자로 ‘천둥’이라는 글자를 적어 보였지만 친구는 그것을 읽지 못했다.

 

그 순간 세종은 큰 충격을 받았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고, 자연의 이치를 더 잘 아는 친구가 왜 글을 읽지 못하는 것일까. 집에 돌아온 세종은 그날 저녁 아버지 태종에게 물었다. “왜 동네의 많은 아이들은 글을 모르나요?” 태종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들은 가난하고 신분이 낮아 배울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글을 모르니 더욱 가난해지고 신분이 낮아지는 것이지. 너는 글을 열심히 배워야 한다.” 세종은 그 말을 듣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백성들이 자연의 이치는 깨우치면서도 글을 모른다면, 그들의 지혜는 기록되지 못하고 사라질 것이 아닌가. 그날 이후 그는 세상의 모순을 온몸으로 느끼게 되었다. 왕위에 오른 후 처음에는 시급한 국정 현안으로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할 여유가 없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백성들이 쉽게 배울 수 있는 글이 필요하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훈민정음 창제의 원동력은 그의 유년 시절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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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자병법(孫子兵法)은 고대 중국의 병법서로, 손무(孫武)가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책은 전쟁 전략과 전술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으며, 수많은 판본과 해설서가 존재합니다. 

 

세종은 어린 시절 자연과의 교류 속에서 얻은 깨달음과 함께, 독서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려 했다. 그는 책을 매우 좋아하는 왕이었다. 그가 가장 여러 번 읽고, 가장 큰 감명을 받은 책 중 하나는 손무가 쓴 <손자병법>이었다.

 

이 책은 단순한 전투 전략서가 아니라, 국가 운영과 인재 발굴, 전쟁의 승패 원리 등을 다룬 깊이 있는 병서였다. 세종은 이 책을 읽은 자와 읽지 않은 자를 구별하여 신하들을 대할 정도로 중요하게 생각했다. 특히 <손자병법>의 첫 대목은 그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전쟁이라는 것은 나라의 중대한 일이므로 철저한 이해와 득실을 따져야 한다.” 이는 세종이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에 큰 영향을 주었다.

 

당시 조선은 여진족과 왜구의 침략을 계속해서 경계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세종은 이들과의 관계에서 외교적 방식을 활용하면서도 방비를 철저히 하려 했다. 이는 손무의 사상과 닮아 있었다. 손무는 “싸우지 않고도 승리하는 것이 최선”이라 했고, 세종 역시 군사적 대비를 철저히 하면서도 실전에서의 충돌을 최소화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는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의 방비를 강화하고, 4군 6진을 개척하여 북방의 안정을 도모했다. 동시에 일본과는 외교적 접근을 시도하며 왜구의 침략을 줄이려 했다. 손무의 사상을 깊이 연구한 세종은 “전쟁은 국가의 가장 중요한 문제이므로 신중히 다루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신하들에게 끊임없이 대비를 주문했다.

 

세종에게 국가란 단순한 통치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백성들이 삶 속에서 이치를 깨우치고, 이를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기를 바랐다. 문자가 없으면 백성들은 자신들이 터득한 지식을 후대로 전할 수 없고, 이는 국가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가 된다.

 

세종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그는 오랜 연구 끝에 한자의 복잡성을 줄이고, 누구나 쉽게 익힐 수 있는 문자를 만들기로 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훈민정음이었다. 이는 그가 어린 시절 경험한 배움의 차별에서 비롯된 결정이었으며, 한 나라의 왕으로서 백성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자 한 결과였다.

 

또한 세종은 문자의 보급과 함께 백성들이 배울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기 위해 여러 정책을 시행했다. 그는 집현전을 설치하여 학자들에게 연구의 기회를 주었고, 백성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방안을 마련하였다. 그의 이러한 노력이 결국 조선의 문화적 발전을 이루는 초석이 되었다. 세종이 읽었던 <손자병법>의 사상과 그가 직접 겪은 경험들이 하나로 연결되어 결국 훈민정음 창제로 이어진 것이다.

 

 

세종대왕의 업적은 단순한 문자 창제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백성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노력한 왕이었다. 군사적으로는 방비를 철저히 하고, 외교적으로는 충돌을 피하며 실리적 이익을 추구했다. 학문적으로는 백성들이 배움을 통해 삶을 개선할 수 있도록 문자를 창제하고 연구를 독려했다.

 

이러한 정책들은 모두 그의 유년 시절 경험과 독서에서 얻은 깨달음이 바탕이 되었다. 세종은 어린 시절 자연 속에서 배운 것과 책에서 얻은 지혜를 결합하여 백성들을 위한 나라를 만들고자 했다. 결국 그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훈민정음뿐만 아니라, 백성을 위한 정치라는 조선의 운영 원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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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포털 지원센터 대표
내외신문 광주전남 본부장
월간 기후변화 기자
사단법인 환경과미래연구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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