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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반일 정서와 대한민국 건국...이승만의 길을 따라"

"독립운동가이자 독재자로서 이승만의 두 얼굴"

홍대선 작가, 이승만의 복합적 유산을 탐구하다"

전용욱 기자 | 기사입력 2024/12/16 [10:00]

"강렬한 반일 정서와 대한민국 건국...이승만의 길을 따라"

"독립운동가이자 독재자로서 이승만의 두 얼굴"

홍대선 작가, 이승만의 복합적 유산을 탐구하다"

전용욱 기자 | 입력 : 2024/12/16 [10:00]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삶과 업적을 재조명하며, 그의 독립운동과 건국 과정에서의 기여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특히 일본에 대한 이승만의 강렬한 반감과 독재적 성향이 현대 한국에 미친 영향을 고찰하며, 그의 복합적인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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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1875~1965)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자 독립운동가로,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났습니다. 미국 유학을 통해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나, 1960년 4·19 혁명으로 하야하였습니다.    

 

홍 작가는 이승만이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을 체결하며 약소국으로서의 현실을 직시한 점을 그의 중요한 유산 중 하나로 강조하며, 이 다큐멘터리 영상이 일본이 왜 이승만을 가장 반감을 가진 한국 대통령으로 평가하는지를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고 평가했다.

 

1875년에 태어난 이승만은 조선의 백성으로, 대한제국의 신민으로 성장하며 시대적 전환기를 온몸으로 겪은 인물이었다. 그의 초기 교육은 전통적인 서당에서 이루어졌으며, 이승만은 서예에 뛰어난 실력을 보유한 유일한 한국 대통령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일본에 대해 평생 강렬한 반감을 가졌는데, 이는 그의 서당 교육을 통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은 일본을 '오랑캐'로 규정하며, 이러한 세계관은 그의 정책과 행동 전반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한국전쟁 중 파로호 이름 변경 사건에서 그의 반공적이고 반일적인 세계관이 명확히 드러났으며, 이는 당시 중국 공산군을 오랑캐로 인식했던 태도와도 일맥상통한다.

 

이승만은 독재자로 평가받으면서도,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민족주의자로서 주목받는다. 독립운동의 방식과 동료 선정에서 비판받을 여지가 있지만, 그가 한국의 독립을 추구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과장으로 여겨진다. 그는 친일파를 중용했던 행보가 독재자로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선택이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일본이 그를 가장 반일적인 한국 대통령으로 간주하는 이유는, 그가 한국과 일본 사이에 '평화선'을 선언하며 해양 경계와 평화를 주장했던 역사적 사건에서도 확인된다. 평화선 선언은 일본이 주권국 지위를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던 시기를 이용한 정책적 행위로, 한국의 해역을 일방적으로 설정하며 일본과의 충돌을 불사한 결과였다.

 

이후 이승만은 일본 어선을 나포하고 어민들과 한국인 포로를 교환하는 등의 실질적 대응으로 평화선의 영향력을 극대화했다. 그러나 평화선은 결국 9천만 달러라는 대가를 치르고 철폐되었으며, 독도 문제를 둘러싼 영유권 분쟁은 현재까지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이승만의 생애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요소는 한국전쟁 당시의 태도이다. 당시 미국이 일본군의 한반도 투입을 제안했을 때, 이승만은 일본군이 한반도에 상륙할 경우 국군이 인민군을 놔두고 일본군을 물리치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밝혔다.

 

이는 일본과의 역사적 갈등에서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으려는 그의 철학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태도는 단순히 감정적 반응이 아닌, 그의 정책 전반에 스며든 반일 정서의 일환이었다.

 

이승만의 또 다른 주요 업적으로는 한미 상호 방위 조약 체결이 있다. 이는 조선과 명나라의 상호 방위 조약과 유사한 역사적 맥락을 지니며, 북한과 소련, 중국이라는 공산권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필수적이었다.

 

이 조약은 한국의 국가 안전과 경제 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당시 이승만은 미국의 전쟁 피로와 공산권과의 갈등을 이용해 반공포로를 석방하며 미국을 압박하는 외교 전략을 구사했다. 1980년대 운동권에서는 이 조약을 사대주의로 비판했지만, 이는 단순히 민족적 자존심의 문제로 볼 수 없다는 것이 홍 작가의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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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과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초대와 세 번째 대통령으로, 각기 다른 시대에 국가를 이끌었습니다. 이승만은 1948년부터 1960년까지 재임하며 대한민국의 건국과 반공주의 정책을 주도했습니다. 박정희는 1963년부터 1979년까지 재임하며 경제 발전과 산업화를 추진했습니다. 두 지도자는 모두 반공주의를 강조했으나, 정책과 통치 방식에서 차이를 보였습니다. 이승만은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과 민주주의를 지향했으며, 박정희는 군사 쿠데타로 집권하여 경제 성장을 우선시했습니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지도자는 대한민국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승만과 박정희의 관계도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 이승만이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는 반면, 박정희는 한국의 경제 발전과 산업화를 이끈 지도자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박정희는 이승만을 '이승만 노인'이라 부르며 혐오감을 표했고, 이를 통해 두 인물이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나라를 바라보았음을 알 수 있다.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유배 생활을 하며 귀국을 기대했으나, 박정희 정권의 거절로 인해 결국 귀국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박정희는 독립운동에서 이승만의 방식에 공감하지 않았으며, 실질적 투쟁을 선호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는 박정희의 가난한 성장 배경과 가족의 사회주의적 경향과도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은 독립운동가이자 초대 대통령으로서 현대 한국에 깊은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그의 정책과 행동은 때로 비판을 받았지만, 그의 생애는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에 중요한 조건으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승만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성장 배경과 시대적 맥락을 함께 살펴봐야 하며, 이를 통해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교훈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홍대선 작가는 이승만이라는 복합적인 인물을 조명하며, 그를 단순히 찬양하거나 비난하는 차원을 넘어, 그가 남긴 유산을 보다 깊이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는 단지 이승만이라는 인물을 넘어서 한국 현대사의 흐름을 읽는 데도 중요한 작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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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과미래연구소 이사
시민포털지원센터 이사
월간 기후변화 기자
내외신문 전북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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