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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의 기억과 현대사의 굴곡

하얼빈에서 울린 독립의 총성.. 안중근 의거의 역사적 의미

해방 이후의 역설.. 정치적 갈등 속에 묻힌 영웅의 기억

현재와 미래를 위한 교훈.. 안중근 정신의 재조명과 계승

전태수 기자 | 기사입력 2024/12/11 [09:03]

안중근 의사의 기억과 현대사의 굴곡

하얼빈에서 울린 독립의 총성.. 안중근 의거의 역사적 의미

해방 이후의 역설.. 정치적 갈등 속에 묻힌 영웅의 기억

현재와 미래를 위한 교훈.. 안중근 정신의 재조명과 계승

전태수 기자 | 입력 : 2024/12/11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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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며 한국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그의 의거는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철저히 계획된 정치적 행동이었다. 이는 단순한 암살이 아니라 조선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목표로 한 강력한 메시지를 담은 사건이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이 영웅의 업적을 온전히 기리지 못한 채, 정치적 갈등과 친일 청산의 부재 속에서 그의 기억을 왜곡하거나 소홀히 다루는 결과를 초래했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며 한국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그의 의거는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철저히 계획된 정치적 행동이었다.

 

이는 단순한 암살이 아니라 조선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목표로 한 강력한 메시지를 담은 사건이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이 영웅의 업적을 온전히 기리지 못한 채, 정치적 갈등과 친일 청산의 부재 속에서 그의 기억을 왜곡하거나 소홀히 다루는 결과를 초래했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한국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주목받았다. 당시 러시아와 미국에서도 그의 의거를 영웅적인 행동으로 평가했으며, 일본에서도 안중근 의사의 사진이 대중적으로 판매될 정도로 큰 관심을 끌었다.

 

일본 경찰이 이를 금지할 때까지 그의 사진은 매진되었고, 한국인들은 이를 보관하며 독립운동의 희망을 표현했다. 안중근 의사는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존경받는 영웅으로 자리 잡았고, 그가 남긴 정신은 독립운동의 기치로 삼을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그의 기억은 정치적 이유로 제대로 기려지지 못했다.

 

특히 이승만 정권 시절 안중근 의사의 기념사업은 여러 차례 방해를 받았다. 안중근 의사의 동상을 세우려는 계획은 초기부터 차질을 빚었으며, 1959년 순국 50주년을 맞아 추진되던 동상 건립과 영화 제작 역시 정부의 비협조로 인해 큰 난항을 겪었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안중근 의사의 순국일과 이승만 대통령의 탄신일이 겹친다는 이유로 기념사업을 축소하거나 방해하는 태도를 보였다. 안중근 의사의 동상을 건립하려던 계획은 남산 조선신궁 자리와 서울역 앞 등을 후보지로 논의했으나, 이승만 정권은 오히려 조선신궁 자리에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을 세우는 데 주력했다.

 

안중근 의사를 기리려는 숭모 사업에는 친일 경력이 있는 인물들이 관여하면서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다. 윤치영과 같은 인물은 안중근 의사 동상 건립을 주도하며 정부의 협조를 이끌어냈으나, 그의 친일 경력은 숭모 사업의 순수성을 의심받게 했다.

 

이는 안중근 의사의 숭모 사업이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진행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독립운동 정신을 기리기 위한 노력이 왜곡된 방식으로 전개된 결과라 할 수 있다.

또한 안중근 의사의 업적을 둘러싼 논란은 단순히 정치적 문제에 국한되지 않았다.

 

해방 이후 독립운동가들을 기리기 위해 거리 이름을 변경하거나 동상을 세우는 상징적 작업이 진행되었으나, 이러한 노력조차 정치적 갈등 속에서 지연되거나 왜곡되었다. 안중근 의사의 동상은 처음에 눈에 잘 띄지 않는 장소에 세워졌으며, 그의 업적을 기리는 동상 건립은 다른 독립운동가들보다도 늦어졌다.

 

더욱이 안중근 의사를 기리는 활동은 해방 이후 친일파 청산의 부재 속에서 많은 한계를 드러냈다. 독립운동가의 정신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한 현실은 안중근 의사를 단순한 역사적 인물로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독립운동의 상징성을 약화시키고, 안중근 의사와 같은 영웅의 기억을 후세에 전하지 못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의 의거가 가지는 의미는 단순히 과거의 역사적 사건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통해 독립과 평화를 위한 희생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몸소 보여주었다. 동양 평화론을 통해 일본과 중국, 조선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으며, 이는 단순한 독립운동을 넘어선 인류애적인 가치를 지닌다.

 

 

오늘날 안중근 의사의 기억은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숭모 사업과 기념사업은 재조명을 받고 있으며, 그의 정신은 새로운 방식으로 계승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해방 이후의 한계와 정치적 갈등 속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온전히 회복하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을 제대로 기리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역사적 평가와 기억의 회복이 필요하다. 안중근 의사의 삶과 정신은 독립운동의 핵심적인 가치를 되새기며, 앞으로도 계속 기념되어야 할 우리의 소중한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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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기후변화 발행인
내외신문 대표 기자
금융감독원, 공수처 출입기자
사단법인 환경과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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