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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밤의 별미, 추어탕의 역사와 재발견

김학영 기자 | 기사입력 2024/11/26 [15:29]

가을 밤의 별미, 추어탕의 역사와 재발견

김학영 기자 | 입력 : 2024/11/26 [15:29]

깊어가는 가을밤, 양반집 마님들이 사랑채로 몰래 들여보낸 음식이 있었다. 한낮에는 천한 음식으로 치부하던 추어탕이다. 하인들과 소작원들이 먹는 음식이라며 거들떠보지도 않는 척하다가, 한밤중에는 정력에 좋다는 이유로 은밀히 서방님께 대접하곤 했다. 드러내 놓고 먹기에는 점잖지 못하고 남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던 음식이지만, 그 효능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추어탕이 정력에 좋다는 이야기는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왔다. 특히 가을에는 살이 통통하게 오른 미꾸라지가 단백질이 풍부하고 기운을 보강해준다고 여겨졌는데, 엿새만 먹으면 줄었던 정력도 되찾는다는 속설까지 있었다. 이러한 속설이 탄생한 배경에는 단순히 민간의 믿음뿐 아니라, 의학적인 근거도 존재한다. 명나라 때 의학서인 본초강목은 미꾸라지가 발기 부전 치료에 효과적이며 양기를 북돋는 식품이라고 기록했다. 조선 후기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도 미꾸라지는 양기가 부족할 때 끓여 먹는 음식으로 소개되며 정력제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서양의 카사노바처럼 동양에서도 정력의 상징으로 꼽히는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소설 금병매의 주인공 서문경이다. 금병매는 선정적인 내용으로 유명하지만, 당시 요리와 음식 문화의 방대한 기록을 담고 있어 중국의 홍루몽과 함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 소설에서 미꾸라지는 서문경의 정력을 상징하며 중요한 소품으로 등장한다. 서문경이 하룻밤에 열 명을 상대하면서도 정력을 유지하기 위해 서역에서 온 승려를 초대해 대접한 음식 역시 미꾸라지 요리였다. 당시 그의 집안 병풍에는 미꾸라지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이는 미꾸라지가 정력과 기운을 상징하는 아이콘임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조선시대 양반들이 추어탕을 대놓고 먹었다는 기록은 거의 없다. 미꾸라지가 천민들의 음식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는 추어탕이 매우 기름진 맛이 나며 성균관의 반인들이 즐겨 먹는 음식이라고 기록돼 있다. 반인은 성균관에 소속된 하급 관리로, 당시 백정만큼이나 천하게 여겨지던 신분이었다. 또 추어탕은 청계천 일대에서 거지들인 '꼭지'가 독점적으로 팔던 음식이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하층민들이 먹던 음식으로 간주되던 추어탕을 양반들이 대놓고 즐기지 못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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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어탕은 시간이 흐르며 점차 사람들의 인식을 변화시켰다. 1924년에 발행된 요리책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는 추어탕 조리법이 등장한다. 하층민의 음식으로 여겨지던 추어탕이 요리로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추어탕은 지역별 특색을 갖춘 음식으로 발전했다. 남원 추어탕은 담백하고 부드러운 맛으로 유명하고, 서울 추어탕은 진한 국물 맛으로 차별화됐다. 특히 전통을 자랑하는 일부 추어탕집은 정재계 유명 인사들이 자주 찾는 곳으로 알려지며 음식 문화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추어탕의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음식의 재발견을 넘어선다. 한때 하층민들의 전유물이었던 음식이 현대에 와서는 고급 요리로 대우받으며 명성을 얻었다. 한 가을밤, 천한 음식으로 치부되던 미꾸라지가 양반들의 사랑채를 지나 현재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건강식으로 자리 잡기까지, 그 여정은 단순한 음식을 넘어 사회적 계층과 문화의 변화를 담고 있다.

 

 

추어탕은 더 이상 은밀한 음식이 아니다. 전통을 살리면서도 현대적인 맛을 더한 추어탕은 건강을 챙기려는 이들에게 사랑받는 보양식이 되었다. 계절이 주는 선물로 시작된 음식이 문화적 상징으로 자리 잡은 모습은 우리의 음식 문화가 얼마나 다채롭고 풍부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번 가을, 깊어가는 밤에 한 그릇의 추어탕을 떠올려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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