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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과 제왕학의 창시자 한비자의 일생:내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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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과 제왕학의 창시자 한비자의 일생

김시몬 | 기사입력 2022/09/13 [00:47]

군주론과 제왕학의 창시자 한비자의 일생

김시몬 | 입력 : 2022/09/13 [00:47]

한비자는 한(韓)나라의 왕족에서 태어났다. 그의 탄생일은 잘 알 수 없지만 사망일은 그가 약 50세쯤 되던 해, 즉 B.C.233년 경으로 보여진다. 이렇게 본다면 그가 탄생한 해는 C. 282년에서 280년 사이가 된다.

탁월한 교사요 저술가였던 그는 진시황(秦始皇)(B.C.256~221)의 영의정(領議政)이사(李斯)와 더불어 순자의 문하생이었다. 법가의 사상을 연구하면서 순자의 인성론이 〈난폭상태(亂暴狀態)>를 제어함에 있어서 법이 도덕에 대치되어야 한다는 법가의 논변에 훌륭한 심리적 토대를 마련해준 것이 틀림없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비자의 청춘기는 한나라의 역사상 가장 비참한 시대에 해당한다. 한나라는 B.C. 5세기 말경 진(秦)나라가 침입한 삼소국(三小國) 가운데 하나였다. 주요전국(主要全國) 중에서도 가장 작은 한나라의 군대는 많은 불운과 재난을 겪었으며, 강대한 이웃나라들은 그 영토를 마음대로 희롱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한나라는 권세를 다투는 강력한 당파싸움에휘말렸다. 이같은 사실들은 법가의 이론가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당시 귀족이었던 한비자는 사회질서의 테두리로서 단호한귀족정치와 법률을 창도하였다. 그는 한나라가 직면한 위험을깨닫고 즉시 대책을 강구하여 행동을 취하는 것이 급선무라는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왕 앞에 나아가, 적의 공격을 눈앞에 두고 조직도 없는 약한 나라로 한나라를 더 이상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고 간하였다. 그는 극단의 공용주의 (功用主義)를 주장하여 정부의 국법을 개정할 것과, 형벌을 중히 여길 것과, 무용지물을 제거할 것을 제언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그뿐만 아니라 왕은 그를 관직에 등용하지도 않았다. 한비자는 낙담하고 실망한 나머지 생활에 묻혀 저술에 꾸준히 몰두한 것으로 보인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한비자는 법에 명시되는 무력으로 나라를 다스리지 않고 문무백관에 대하여 절대권력을 행사하지 않는 왕에게 몹시 실망하였다.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방법은 선량하고유능한 사람을 쓰는 데 있는 것인데 왕은 방탕하고 무능한 사람에게 명예와 권세를 주었다 .....… 한비자는 나라가 평화로울.때는 왕이 학자들을 중히 여기나 어려울 때에는 무사를 쓴다.고 불평하였다.

이리하여 중히 여겨진 사람은 등용된 사람이 아니고 등용된사람은 중히 여겨진 사람이 아니었다.

간악한 조신(朝臣)들에게 배격당한 충량한 사람들을 애석하게 여기면서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삼아 한비자는 그의교훈을 저술하였다.」

그의 저서에서 유학자들은 도무지 현실을 모르고 민중의 완미(迷)와 비행(非行)을 알지 못하는 순 이론가로 형용되어있다. 그는 정치는 현존하는 그대로의 천하의 실상에 기반할 것이며 이들 학자의 비실용적인 정치이론을 실험하고자 해서는 안된다고 굳게 믿었다.

「현재 제왕의 통치를 논의하는 학자들은 지금의 정치상태는 덮어두고 과거의 정치의 공과만을 운위하고 있다. 그들은관법(官法)의 실상은 조사하지도 않고 왜곡된 민중의 상태는연구하지도 않으면서 고대의 전통만 이야기하고 있다.

선왕들의 장점을 모범으로 떠받들면서 학자들은 점잖은 말투로 우리의 충고를 들으라, 그러면 그대는 영특한 군주가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런 말은 요술의 기도와 같은 것이다. 유능한 통치자는 그런 충고를 듣지 않을 것이다. 똑똑한군주는 현실을 보고 쓸모없는 것은 버릴 줄 안다. 그는 인의(仁義)를 설교하지도 않고 학자의 충고에 귀를 기울이지도않는다.」

한비자의 가르침을 처음 시도한 사람은 진시황(秦始皇)이었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한비자의 저서 중 『고분(孤憤)」과『오두(五寶)』가 우연히 진시황의 손에 들어갔을 때 진시황은이 책을 보고 「이것이야말로 바로 내가 기다리던 것이다. 내가 이 사람을 만나 같이 놀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 외쳤다고 적혀 있다.

진(秦)나라는 이웃나라의 가장 훌륭한 인재를 찾아서 고관과 장군을 삼는 정책을 채택하였고 그럼으로써 B.C. 3세기중엽에는 전문적 학자들이 조정에 많이 모여들었다.

초나라 태생인 이사(李斯)가 진의 영의정(領議政)이 된것도 이때였다. 그러나 한비자는 남다른 애국심의 소유자였으므로 왕이 자기를 등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모국에서 충성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뛰어난 재능을 적국에 바치려 하지 않았다.

B.C. 3세기 전엽(前葉)에 진은 강적 초와 싸워 거듭 승리하고 그 영토의 상당 부분을 병합시켰다. 마지막 승리는 한비자와 같이 배웠으며 진시황의 영의정이 된 이사의 도움으로이루어졌다. 진나라와 가장 인접해 있던 한나라는 진나라의판도(版圖)를 확보하기 위하여 맨 처음으로 병탄(倂?)되게되었다. 한비자가 한의 친선외교사절로서 진에 파견된 것은이사가 가장 정력적으로 야망을 펼치던 때였다.

한비자는 진의 궁정에서 후한 대접을 받았고, 이것은 당연히 이사를 포함한 관리들의 질투심을 유발시켰다. 그들은 왕앞에 나아가 한비자를 중상모략함으로써 마침내 이 빈객(賓客)은 반역죄로 몰려 투옥되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사는한비자에게 독약을 보내어 자살하라고 권고하였다. 한비자는황제 앞에서 고백하고자 했으나 알현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황제는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그를 석방하라는 명령을내렸지만 그때 이미 한비자는 죽어 있었다.

한비자의 생애는 주왕조에서 진왕조에 이르는 과도기에 걸쳐 있다. 이 시기는 중국의 사회구조의 변화로 이르는 결정적인 동기였다.

B.C. 약 250년경 진은 봉건제국 중에서도 경제적으로 가장 강대한 나라였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의 봉건제도에 종지부를 찍었던 것이다. 진은 새로운 경제·사회 사정에 아주 훌륭하게 어울리는 법가의 사상의 원리에 따라 통치되었다.

그의 교훈은 그 자신의 이름을 땄으며, 상당한 가치를 지닌 강론 55편이 들어 있는 저서에 간직되어 있다. 이 강론은 B.C. 4세기와 3세기의 법가사상의 완전한 종합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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