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어에 담긴 진심을 그대로 전하는 고종석의 ‘어린 왕자’ 출간- 『어린 왕자』의 한국어 결정판- 유럽어에는 있지만 한국어에선 그렇지 않은 명사의 복수 표지 “-들”을 그대로 적용- 경어(vouvoyer)와 평어(tutoyer)의 구분을 원문 그대로 따라 캐릭터간의 친소 관계 표시[내외신문 =조동현 기자] 왜 이 시점에 『어린 왕자』일까 지금까지 한국어판 『어린 왕자』는 이본異本만 1백여 종에 달한다고 한다. 여기에는 김현, 김화영, 황현산 등 프랑스문학을 전공한 불세출의 문학평론가들이 옮긴 판본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런 조건에서 『어린 왕자』 번역본을 굳이 한 권 더 보탤 필요가 있었을까. 그것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의식의 주파수와도 같은 ‘언어’를 매개로 프랑스적 감수성이 이미 깊이 내면화된 고종석에게 기존 번역본은 어떤 갈증과 결핍을 안겨주었던 것 같다. 그는 이 책에 쓴 「역자 서문」과 「역자 후기」를 통해 자신이 번역한 『어린 왕자』에 대한 자부심의 일단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삼가는 마음이 없지는 않으나, 지금 독자가 읽을 이 텍스트를 『어린 왕자』의 한국어 결정판이라 여긴다. 이 텍스트는 한국어라는 옷을 입은 프랑스어다. 프랑스어에 완전히 밀착한 한국어! 그러나 그것이 한국어에 대한, 그리고 프랑스어에 대한 내 자부심이다.” 역자가 밝힌 자부심은 곧 기존 번역본들과 차별화한 내용들이 담보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첫째 고종석 번역본은 프랑스 갈리마르판 원서 『Petit Prince』의 편집 체제를 가장 정확하게 이해하고 이를 한국어판에도 그대로 적용했다. 예컨대 한국문학 출판사들이 모종의 합의에 의해 관행적으로 써온 구두점과 문장부호 등을 파기하고 원서가 채택한 문장부호, 이를테면 독백이나 의식의 흐름을 표현하는 ≪≫나 대화를 표시하는 대시― 같은, 한국의 문학출판에선 생소한 부호를 그대로 살린 것이다. 이와 같은 형식의 존중 속에서 프랑스 서사문학들이 전통처럼 계승해온 이야기 방식을 그대로 존중하면서 거기서 발생하는 미세한 내용의 차이까지 담으려 했다. 고종석 번역본이 시도한 두 번째 차별화는 유럽어에서는 뚜렷하지만 한국어에선 그렇지 않은 명사의 복수 표지 “-들”을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한국어는 복수가 뚜렷한 명사에는 복수 표지를 별도로 하지 않는다. 예컨대, “식당이 많다”고 쓰지 “식당들이 많다”고 쓰지 않는 것처럼, 혹은 “흔한 진주목걸이”가 “흔한 진주목걸이”보다 자연스러운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프랑스어에서는 다른 유럽어와 마찬가지로 명사의 복수 표지를 분명히 표현한다. 이 책은 그 언어 관행을 존중했다. 따라서 본문 속에는 “오억 개의 별들”이나 “모든 날들”, “바다들과 강들과 도시들과 산들과 사막들” 같은 표현도 보일 것이다. 이 역시 프랑스어가 가진 특유의 감각을 독자들이 그대로 촉지할 수 있게끔 옮긴이가 의도한 결과이다. 세 번째 차별화는 경어(vouvoyer)와 평어(tutoyer)의 구분을 원문 그대로 따른 것이다. 이에 대한 역자의 설명을 직접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기존 번역들은 이 차이에 무심한 경우가 많았다. 프랑스어에서의 경어와 평어는, 물론 위계질서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친소 관계를 드러낼 때가 많다. 어린 왕자는 때로 처음 보는 사람에게 평어를 쓰기도 하고, 때로는 경어를 쓰다가 평어로 바꾸기도 한다. 독자들은 어린 왕자의 말투에서, 그 아이와 대화 상대의 관계를, 그러니까 위계나 친소 관계를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다. 경어와 평어의 엄격한 분리에 있다.” 마지막으로 짚을 수 있는 차별화는 작품 속 내레이터가 어린 왕자를 지칭할 때 다른 번역본들은 모두 ‘그’라는 일률적인 대명사로 옮긴 반면 이 책에선 ‘그 아이’나 ‘이 아이’로 옮긴 것이다. 이는 『어린 왕자』라는 작품에서 어린 왕자라는 캐릭터가 수행하는 아이덴티티가 어린이의 세계를 대리하고 있다는 역자의 엄격한 해석에 의한 것이다. 옮긴이가 꼼꼼하게 옮기고 정리한 본문 텍스트 외에 이 책에는 본문과 저자 생텍쥐페리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서브텍스트들이 풍요롭게 수록되어 있다. 먼저 「역사 서문」과 「역자 후기」는 이 번역본의 특질과 지향을 알려주고 있는데, 역자 서문에서 고종석이 밝히는 번역의 계기는 솔직하면서도 숙명적이다. “한국어와 프랑스어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언어이고, 『어린 왕자』는 기독교 성서 다음으로 많은 언어로 번역된 텍스트라고 들었다. 그리 많은 언어로 번역됐다는 것은 이 작품이 전 세계의 독자들로부터 깊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 뜻일 텐데, 그것은 『어린 왕자』가 비루한 현실과는 거리가 머나먼 환상적 동화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동화처럼 살지 못하는 수억의 사람들이 이 책을 읽는다. 종교가 민중의 아편(칼 마르크스)이고, 마르크스주의가 지식인들의 아편(레몽 아롱)이라면, 『어린 왕자』는 어른들의 아편이다. 『어린 왕자』에 ‘길들여진’ 수억의 어른들이 이 책을 읽는다. 내가 이 『어린 왕자』의 세계관을 맞갖잖아 하면서도 이 책을 거듭 읽어온 것은 그것이 내 아편이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한국어판 『어린 왕자』가 아니라 ‘내’ 한국어판 『어린 왕자』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고 밝혔다.
역자소개 고종석 소설가이자 언어학자, 저널리스트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성균관대학교 법률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와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에서 언어학 석사, 박사 과정을 마쳤다. 프랑스 외무부의 지원을 받아 파리에서 중견 언론인 연수프로그램 ‘유럽의 기자들’을 이수했고, 한겨레 파리 주재 기자와 한국일보 논설위원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 『파리의 기자들』, 『제망매』, 『엘리아의 제야』, 『독고준』, 『해피 패밀리』, 『감염된 언어』, 『말들의 풍경』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모국어의 속살』, 『어루만지다』, 『서얼단상』, 『코드 훔치기』, 『도시의 기억』, 『여자들』, 『고종석의 문장』(전2권)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이게 다예요(C'est tout)』가 있다. 주저主著주저 『감염된 언어』는 영어와 태국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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