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된 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주고, “자유와 책임의 참 언론"을 구현하는 기자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전병길 기자 / 기사작성 : 2018-11-03 09: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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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에 대한 대부분의 신화가 감시의 가치와 관련된 것을 보면 아무래도 권력 감시가 적어도 바깥에서 보기에는 더 크게 느껴지기도 하나 봅니다.

이러한 기능을 저널리스트나 언론학자들은 이상적인 언론의 역활로 권력을 감시하는 ‘감시견(watch dog)’에 비유하는데, 이에 자주 ‘애완견(lap dog)’이나 ‘경비견(guard dog)’, '공격견(attack dog)',그리고 ‘잠자는 개(sleeping dog)’와 같이 다른 용어가 대입되는 것을 보면, 이 감시가 그렇게 쉽지는 않은 듯합니다.


'애완견'은 권력을 감시하기는커녕 권력의 귀여움을 받는 언론이고, '경비견'은 오히려 권력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언론입니다. 이처럼 언론의 기능이 왜곡되는 이유는 현실에서 권력과 자본앞에서 자존심을 지키며, 공명정대하게 사실과 진실을 추구하는게 그만큼 교과서처럼 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감시견(watch dog) 즉,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또한 가장 이상적인 언론의 역할로 권력을 감시하는 ‘감시견(watch dog)’입니다. 일찍이 18세기 영국의 정치철학자 에드먼드 버크가 제4계급으로서의 언론의 위상을 설파한 이래, 전통적으로 행정, 입법, 사법부를 감시하는 제4부(the fourth estate)로서의 언론의 역할은 예나 지금이나 가장 모범적인 것으로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권위주의 시대의 언론의 역할은 권력의 비위를 맞추는 이른바 ‘애완견(lapdog)’으로 치부되어 왔습니다. 애완견으로서의 언론은 지배 그룹인 파워 엘리트들만의 이익을 위해 존재함으로써 정치적, 경제적 기득권 세력의 ‘현상유지’에 동원됩니다. 과거 군부 정권 시대의 언론 통제정책은 대부분의 언론을 애완견의 역할에 머물도록 강제했습니다.

권위주의 시대를 지나면서 언론을 권력의 한 부분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언론이 권력에 편입돼서 사회의 변화를 원치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 언론은 ‘경비견(guard dog)’에 비유되곤 합니다

미국의 언론학자인 필립 티치너 등이 내놓은 견해에 따르면, ‘경비견(guard dog)’론은 지배세력에 의존적이긴 하지만 복종적은 아니며 때로는 지배세력간의 갈등을 이슈화시키기도 한다. 이 경비견의 목적은 위와 같은 과정을 통해, 특정한 지배세력이 아닌 지배체제 자체를 수호하고 이 체제를 위협하는 세력을 향해 가장 먼저 짖는 역할을 합니다.

특히 몸집이 거대해진 최근의 언론을 비판적으로 보는 이들은 언론 자체가 하나의 권력으로 다른 권력에 대항하거나 혹은 협조함으로써 자신의 기득권을 지켜나간다는 견해에 동의하는 것 같습니다.

공격견(attack dog) 개념은 미국의 패터슨이 진전시킨 메타포(metaphor)입니다.


정치적 특정 국면 혹은 상황에서 언론은 자신의 이데올로기로 무장하고 정치인 공격과 정치비판을 일삼습니다. 그 비판에 대해서는 전혀 책임을 지지 않으며 심한 경우 정치 지도자들이 위임받은 권리를 행사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공신력마저 박탈하려합니다. 이러한 언론은 권력이나 권력구조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권력을 비판하고 불신을 조장한다는 점에서 ‘공격견’으로 비유될수 있습니다. (조항제)

어떤 면에서는 지금의 언론은 잠자는 ‘개(sleeping dog)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든 프로그램이 오락화되어 가고 있는 것이 그 예입니다. 


“무서운 동질화이다. TV 연속극들의 '불륜의 강도(强度)'는 점차 높아지고 있다. 점차 쇼 프로그램이나 연예인들의 토크쇼도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오락 프로그램'으로 구분된 것들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시사프로그램이나 교양프로그램도 뚜렷한 오락화·연질화(軟質化) 현상을 보이고 있다. 자연 도큐멘터리들도 점차 극화(劇化)되고 있다.”

“《…시선집중》의 공격적인 질문은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 그것이 청취율을 고려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100분 토론》에서 그것은 특히 토론자를 정할 때나 토론 주제를 정할 때 고민의 핵으로 작용한다.”
“인기있는 토론자를 세우고자 하는 욕심은 늘 있지만, 그러면 또 항상 같은 사람을 세우게 된다. 또, 교육이나 사회 현안에 대해 토론을 하고 싶지만, 정치 문제가 아니면 시청률이 높게 나오질 않는다.
스스로는 '정도(定道)'와 '금도(禁道)'를 지켜야 하지만, 시청률이 지나치게 낮으면 프로그램이 '의미'를 잃게 되기 때문에 무작정 오락성을 배척할수 만도 없는 것이다.“ (손석희)

국내에서 주류언론사가 위의 메타포(metaphor)에서 어디에 위치하고 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모든 견해들은 좀 극단적이기도 하거니와 현실적으로 위의 모든 역할들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나타난다기 보다는 어느 정도는 혼재되어 나타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치적 격변기마다 거대 언론사를 비롯한 이 나라 언론이 보여준 변신의 달인과 같은 모습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자청해서 시녀가 됐기에 권력자들은 마음 놓고 애완견으로 길들이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헌법이 보장한 언론의 자유와 국민의 알 권리와 무관의 제왕이라는 보이지 않는 막강한 힘을 가진 언론이 진실보도를 두려워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감시견으로서 물어야 할 것을 핥아주고 있다면 그 대가는 무엇일까.

소외된 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주고, “자유와 책임의 참 언론을 구현하는 기자(혹은 언론)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헛된 공명심에 사로잡혀 있거나 메이저 언론사에 소속되어 있는 것으로 안주하는 기자가 아닌, 진정정을 갖고 취재수첩을 가슴에 품은 그런 기자 말입니다.” (‘기자로 산다는 것’ 시사저널 23명의 전 현직 기자 이야기 중)

“언론의 자유는 모든 자유를 자유케 하는 자유”라는 (신흥범) 말처럼, 아직 언론의 자유는 면면히 그 생명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언론이 죽으면 민주주의는 퇴보합니다. 희망도 사라집니다.

언론은 권력과 상업 자본에 종속되지 않고 , '춘추직필(春秋直筆)'정신 ·지성(intelligent)·용기(brave)등 독립 언론의 가치를 기반으로 취재.보도하는 자세가 더욱 필요할 때입니다.

언론사만 있고 언론(정신)을 찾아 보기 어려운 시대에 대한민국 언론은 권력의 애완견이어서는 안 된다는 믿음으로 추운 벌판을 지키고 있지만..., 외롭습니다. / 전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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